‘파괴는 건설이다.’ 라는 말이 있다. 창조에는 건설과 파괴가 공존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파괴를 두려워한다면, 새로운 창조는 그만큼 늦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병아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튼튼한 보호막이었던 껍질을 깨트려야 하고,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헌 건물을 부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따라서 창조에 전념하려면 항상 도전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특히, 새로운 발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잠시 법칙이나 규칙 따위에서 해방되는 것도 필요하다. 창조는 법칙의 파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백 십여 년 전, 영국의 한 탄광에서 사용하던 호롱등불은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좋은 예이다.

노상탄광을 제외한 대부분의 탄광은 지하로 수 십 미터씩 파내려 가기 때문에 갱내가 깜깜하고 어둡다.

지금은 전기를 충전하는 전등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이것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갱내에서 사용할 조명기구가 커다란 문제였다. 갱내에는 폭발성이 강한 가스로 가득 차 있어, 당시 유일한 조명 수단인 호롱불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철망으로 둘러싼 호롱불을 갱내로 가지고 들어가면 어떨까?’
영국왕립학회 회장이었던 데비는 램프의 불꽃이 철망 밖으로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과학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때, 구멍이 숭숭 뚫린 철망으로 기체와 불꽃을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철망의 사이사이로 가스가 새어 들어가면 커다란 폭발 사고가 날걸.’
하지만 데비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시도해 보는 거야! 결과는 두고 봐야지. 완전한 법칙은 없는 법이니까.’
결과는 놀랍게도 새로운 안전등의 발명을 가져왔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만일 데비가 상식과 법칙에 얽매어 있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쾌거였다.

인류는 바로 이런 발명가들에 의하여 발전해 왔다. 인간은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없고, 새처럼 날 수 없으며,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 없다는 법칙을 깨트린 이들도 바로 이 발명가들 이었다.

법칙은 창조하는 거대한 망치로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건설을 위한 파괴라면 과감히 도전하여 새로운 창조를 기약하자.

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겸임 U1대 발명특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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