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B에게 액면금 합계 19억 2,370만 원인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어주면 2천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위 거액의 수표는 A가 불법 금융다단계 유사수신행위에 의한 사기범행을 통하여 취득한 범죄수익이었다. B는 수표가 범죄수익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표를 건네받아 일부는 현금으로 바꾸었고, 나머지는 수표 그대로 갖고 있다가, 현금과 수표를 A에게 반환하지 않고 B가 임의로 18억 8,370만원을 사용하였다.

딱 봐도 A도 나쁘고 B도 나쁘다. A는 사기를 친 것이고, B도 잘못을 하긴 했는데... A의 돈을 B가 보관하고 있는 상태에서 A에게 반환하지 않고 B가 쓴 것이므로 횡령죄가 되는 것일까? 검사도 B를 횡령죄로 보았고, 하급심 판사도 B를 횡령죄로 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남의 돈을 가져다가 18억 8370만원이나 쓴 B를 횡령죄로 보지 않았으니...

‘불법의 원인으로 인하여 재산을 급여하거나 노무를 제공한 때에는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라는 민법 제746조의 규정 때문이다. 불법의 원인으로 인하여 재산을 급여한  사람은 그 원인행위가 법률상 무효임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할 수 없음은 물론 급여한 물건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여 소유권에 기한 반환청구도 할 수 없다는 데 있으므로, 결국 그 물건의 소유권은 급여를 받은 상대방에게 귀속된다.

B가 이 사건 수표를 교부받은 원인행위는 이를 현금으로 교환해 주고 대가를 지급받기로 하는 계약으로서, 범죄수익 등에 해당하는 이 사건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하여 그 특정, 추적 또는 발견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은닉행위를 법률행위의 내용 및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제3조 제1항 제3호에 의하여 형사처벌되는 행위이다.

범죄수익은닉규제법에 의하여 직접 처벌되는 행위를 내용으로 하는 이 사건 계약은 그 자체로 반사회성이 현저하다. 또한 형벌법규에서 금지하고 있는 자금세탁행위를 목적으로 교부된 범죄수익 등을 특정범죄를 범한 자가 다시 반환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그 범죄자로서는 교부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언제든지 범죄수익을 회수할 수 있게 되어 자금세탁행위가 조장될 수 있으므로, 범죄수익의 은닉이나 가장, 수수 등의 행위를 억지하고자 하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의 입법 목적에도 배치된다.

따라서 B가 받은 이 수표는 ‘불법의 원인으로 급여한 물건’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 수표의 소유권은 A로부터 B에게 건네졌을 때 이미 B의 소유가 되었다. B가 B 자신의 돈을 사용한다는데 죄를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B는 횡령죄는 아니고, 범죄수익은닉규제법으로만 처벌된다는 것이다(대법원 2017. 4. 26. 선고 2016도18035 판결 참조).

정헌수 변호사
새연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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