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연중 / 그림 김민재
연구비는 얼마든지 지원
“거미줄보다 가늘고 철선보다도 질긴 나일론은 공기와 물과 석탄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1937년 2월의 어느 날, 조간신문을 받아본 전 세계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나일론은 캐러더즈라는 젊은 화학자의 발명품이지 기적이 아니었다.

1927년 캐러더즈는 뒤퐁사 연구소에 입사하였다. 화학부장인 스타인 박사는 캐러더즈에게 연구소의 특징을 설명했다.

“우리 연구소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필요한 연구비는 얼마든지 지원됩니다. 마음껏 연구해 보시오.”
캐러더즈는 마치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다. 그는 이듬해 기초연구부의 부장이 되어 인조고무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연구 덕분에 뒤퐁사는 소련보다 앞서 인조고무 듀프렌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이후 캐러더즈는 40여 건에 가까운 물질을 발명하면서 연구의 깊이를 더해갔다.

1935년 나일론 발명
1930년 어느 날, 드디어 나일론 탄생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순간이 왔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동료 연구원 힐 박사가 캐러더즈를 급히 불렀다.
“캐러더즈 박사님, 이걸 좀 보세요.”
“아니, 이건 실모양의 초중합체(실 모양으로 결합한 매우 분자량이 큰 화합물)가 아닌가? 그래, 이게 우리 연구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네.”
그들은 새로운 발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5년간이나 계속된 연구 끝에 드디어 1935년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폴리아미드, 즉 나일론을 발명했다. 그들은 오랜 연구 끝에 발명한 폴리아미드의 탄생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폴리아미드는 탄소원자의 수가 66개라는 것에 착안하여 ‘폴리마 66’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 소식은 곧 뒤퐁사 전체에 퍼졌다. 사람들은 캐러더즈가 기적을 이루었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뒤퐁사에서는 매일 섬유 관계의 화학자와 기술자들이 모여 폴리마 66의 상품화를 위한 회의를 계속했다.

그러나 상품화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나일론의 원료가 되는 헥사메틸렌디아민과 아디핀산이 미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원료의 구입방법과 실의 염색방법 등 구체적인 방안들이 계속 연구되었다.

마침내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38년 나일론은 양말과 낚싯줄의 형태로 상품화 되었다. 뒤퐁사는 이 연구에 2,700만 달러에 가까운 연구비를 투자했다. 그러나 정작 발명자인 캐러더즈 박사는 나일론이 시판되기 전인 1937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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