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3.1절 노래의 첫 구절이다. 매년 3월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많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이다.

이와 함께 일제하에서도 오로지 우리 민족의 경제발전을 위해 발명에 매진했던 수많은 개인발명가들이다. 몇 분의 사례만 살펴본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1930년대 전후에도 우리나라 개인발명가들은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안복평 님은 고량전분정제법 등 특허 5건과 실용신안 16건을 등록받았고, 오영수 님은 간유가공법 등 특허 2건과 시용신안 14건을 등록 받았다.       

17세 때부터 측량기 등 다수의 발명을 하여 천재소년발명왕으로 불리었던 손창식 님은 만년필IR을 비롯해 문지기와 야간사격장치 등 특허와 실용신안을 46건이나 등록받았는데, 특히 만년필IR은 일본과 미국 등에 수출까지 하기도 했다. 손창식 님은 국내외 발명 관련 상을 다수 받으며 중국으로 진출해 정밀가공업으로 크게 성공해 당시 이화여전과 중앙가정여숙 그리고 광주의전에 거금을 희사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승택 님은 수중동력기를 발명하여 기업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50원을 받고 양도했으며, 최재념 님은 고압기체발생기와 회전원동기를 발명했는데, 당시 일본의 비행기제작소와 중공업 업체에서 특허권 사용요청이 올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송기주 님은 42개의 키를 가진 한글타이프라이터를 발명하여 미국 언더우드사에서 대량 생산되었으며, 이광숙 님의 정미기와 한수경 님의 고려자기 제조에 관한 특허는 당시 과학자들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권영호 님은 미국으로 건너가 직상직하 비행기(헬리콥터)를 발명한 데 이어 화이어리스 모터를 발명해 무선기 제작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다.

이 분들이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의 발명 열기는 식지 않고 후손으로 이어져 드디어 산업재산권 출원 세계 4위의 발명민족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 발명은 개인발명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분들은 정부 산하 및 기업연구소가 탄생하기도 전부터 발명에 매진했고, 1980년대부터는 개인발명가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정부 산하 및 기업연구소가 크게 늘고, 여기에서 수준 높은 발명이 쏟아져 나오면서부터 개인발명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특허청이 발표하는 산업재산권 출원 동향이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요즘 국-내외 발명전에서 만난 개인발명가들을 대부분이 정부의 지원이 미미해 힘들다는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지원제도를 가지고 있는 국가도 흔치않다. 스스로 수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 다시 개인발명가시대를 활짝 열어보자.

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겸임 U1대 발명특허학과 교수
저작권자 © 넥스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