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과학의 달이고, 5월은 발명의 달이다.

우리나라 최초 발명과학대중화 운동가는 누구일까?

여러 분이 있지만 누가 뭐라 해도 김용관 선생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화학공업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장학생에 선발되어 동경 구라마에고등공업학교 요업과를 졸업한 요업전문가였다.

일본 유학 중 일본의 근대화가 발명과학의 대중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선생은 1919년 귀국, 총독부 산하 중앙공업시험소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1922년 조선공예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나섰다.

그러나 자금난 등으로 7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런 와중에도 선생의 가슴 속에는 조선의 발명과학대중화가 시급하고, 서둘러 실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24년 선생은 드디어 경성공업전문학교 동기인 현득영·박길용 등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분들과 함께 ‘발명학회’를 설립하고 발명과학대중화 운동에 나섰으나 역시 자금난으로 6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은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1931년 또 다시 발명학회 재기에 나섰다.

선생은 ‘동아일보’ 등 각종 신문·잡지에 발명과학대중화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글을 연재하며 발명과학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다.

1933년 6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명과학전문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기도 했다. 이 전문지는 윤치호 선생을 의장으로 1934년 조직된 과학지식보급회에 인계되어 1935년 2월부터 1944년까지 발간되었다.

선생 등을 중심으로 제정된 제1회 과학데이 기념식은 1934년 4월 19일 밤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기념식은 우리나라 과학지식보급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조선총독부는 1937년부터 과학데이 행사를 제지했고, 1938년에는 급기야 과학데이 행사를 추진하던 선생을 체포했다.

선생의 투옥과 함께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되고, 과학데이 행사도 중단되었다. 옥고를 치른 선생은 1940년 과학조선이 복간되었을 때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 중학교에 재직하면서도 발명과학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0년대 발명과학대중화 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용관 선생. 해방 후 선생은 서울공업고등학교 교사, 특허국 심사관, 발명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1건의 특허도 가지고 있다.

조선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발명과학대중화 운동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발명과학대중화 운동만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전공인 요업사업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선생은 196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철산동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묻혔으나 이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일제의 탄압과 고문으로 선생이 이루지 못한 꿈은 드디어 우리나라 산업재산권(특허·실용신안·디자인·상표의 총칭) 출원 세계 4위의 밑거름이 되어 그 결실을 맺고 있다.

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겸임 U1대 발명특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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