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과학의 달이고, 5월은 발명의 날이다. 과학과 발명이 개인은 물론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으로 떠오르면서 과학과 발명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산업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과학과 발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놀랍게도 일제시대 부터이다. 우리나라를 산업재산권(특허-실용신안-디자인-상표의 총칭) 출원 세계 4위로 끌어올린 씨앗을 뿌려준 일제시대 발명가들을 추적해 본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시대. 당시 순수 민간단체인 과학지식보급회와 발명학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1935년을 전후해 산업과 관계된 발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즉 1932년에는 안복평 등의 발명가가, 1933년에는 오영수 등의 발명가가 활발하게 발명에 도전했다.

대표적인 발명가는 손창식. 그는 17세 때 측량기 등 3건을 발명하는 등 어려서부터 각종 발명을 하여 신문에서 ‘천재소년 발명왕’으로 극찬했다. 이후 만년필 IR을 비롯해 문지기, 풍력 투완구, 야간사격장치 등 특허와 실용신안이 무려 46건에 이르렀다. 대표 발명이라 할 수 있는 만년필 IR은 이리듐을 펜 끝에 달아 촉을 닳지 않게 했던 것인데, 이 특허는 일본을 비롯해 미국 및 유럽에까지 수출되기도 했다.

같은 시대에 이성원은 고무접착제인 만역호를 발명해 기업화에 성공했으며, 선호익 역시 송풍구(풀무)를 발명해 기업화에 성공했다. 또 문용채는 인조피혁과 여과기 등을 발명해 기업화에 성공했고, 이덕균은 등사판 잉크 공급장치를 발명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심승택은 1929년 18세 소년으로 수중동력기를 발명해 당시 신문의 사설로까지 취급되는 등 관심을 모았으며, 그가 발명한 전기신호장치는 특허등록이 되자마자 당시로서는 거금인 50원에 기업에 팔리기도 했다.

당시 홍일점 여류 발명가 이소담은 조선재단기를 발명해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 전규의 보온기, 김영배의 흑판닦이, 송필수의 포키트용 사진구, 서병훈의 행시계전 장치(라디오의 청취시간을 맞춰놓는 장치) 등이 당시 주목을 끌었다. 최재념은 1935년에 고압기체발생기와 회전원동기를 발명했는데, 일본의 비행기 제작소와 중공업 업체에서 특허권 사용 요청이 올 정도로 수준 높은 발명이었다.

송기주는 42개의 키를 가진 한글타이프라이터를 개발했는데, 1933년에 언더우드 사에서 대량생산해 화제가 되었다. 한글타자기는 이보다 20년 전에 이원익이 85개의 키를 가진 것을 발명했는데, 송기주는 42개와 2개의 이동키를 갖춘 편리한 타자기로 발명했다. 이밖에 이광숙의 정미기와 한수경의 고려자기 제조에 관한 특허는 당시 과학자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특히 권영호는 1927년 직상직하 비행기(지금의 헬리콥터)를 발명해 미국으로 갔으나 외국인이라서 외면을 당해 햇빛을 보지 못했다.

과학의 달과 발명의 달을 맞아 그들에게 감사하며 명복을 빈다.

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유원대 IT융합특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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