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그에게 들어와 앉으라 말하리라"

힘과 용기의 다른 점에 대해 미국의 영화감독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힘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앞길 창창한 나이에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 질환으로 시력을 잃은 개그맨 이동우씨가 고통의 장막을 걷고 삶의 무대에 다시 서기까지도 용기가 필요했다. 암전처럼 깜깜했던 시간을 지나 ‘오늘도 축복’인 하루하루를 만드는 그의 희망 보고서.

개그맨 이동우(41)씨를 만난 곳은 연극 <오픈 유어 아이즈>가 공연되는 대학로의 한 소극장. 갑자기 시력을 잃은 남자가 겪는 시련과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을 그린 이 연극에서 그는 주인공 ‘장윤호’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다. 간간이 터지는 포복절도 유머, 개그맨이지만 가수 못지않은 노래 실력은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시력이 5퍼센트밖에 남지 않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터. 하지만 그는 무대 동선을 한 번도 비켜가지 않았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동료 배우들과 수십 번도 더 연습한 결과다. 그랬다. 그는 변함없이 무대 위에서 프로였고, 그의 ‘끼’는 여전히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뒤통수치는 농담 같은 삶
“망막색소변성증입니다. 아직까지 의학계에서 밝혀진 건 없지만 진행성 질환으로… 음… 동우씨는 지금 상태로 보면 마흔 살 전후로… 실명합니다.”

손꼽힐 만큼 잘나가는 연예인은 아니더라도 라디오 DJ, TV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 틴틴파이브 멤버로 만족할 만하게 살던 그가 2004년 3월에 들은 청천벽력 같은 얘기다. 꽤 오랫동안 길눈이 어둡다 싶었고, 밤만 되면 야맹증이 심해져 자주 넘어지고 운전할 때 몇 차례 중앙선을 넘은 적은 있지만 실명이라니! 당시 그는 결혼한지 100일 된 새신랑. 믿을 수 없는 얘기를 전해 듣고 돌아오는 차 안, 야속하리만치 눈부시던 봄 햇살이 아직도 생생하단다.

“실명 선고를 듣고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됐죠. 뭘 먹어도 맛을 모르고, 지금이 몇 시인지, 어느 공간에 있는지, 옆에서 누가 제 이름을 불러도 모르는 무감각한 상태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억울할 때 흘리는 눈물이 가장 짜다던가. 어떤 사고를 당해도 원인이 분명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규명될 때는 해결 방법이 있지만, 원인도 없고 가해자도 없는데 고스란히 피해자가 된 느낌. 그는 억울함의 한복판에서 오열했다.  

 

“부정하고 싶더라고요. 오진이라는 말이 듣고 싶어 각양각지의 명의와 망막 계통의 권위자들을 찾아다녔어요. 심리 치료와 민간요법도 다 해봤고. 무엇보다 바란 건… 기적이었죠.”   “누가 봐도 폭군 같은 일상이었어요. 누가 제 옆에 없으면 없어서 화가 나고, 있으면 있어서 화가 났죠. 화가 나면 집어던지고 부수고 소리 지르고. 정말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었어요. 많은 중도 장애인들이 겪는다는 우울증 역시 비켜가지 않았는데 충동적으로 ‘죽어버리겠다’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루 일과처럼 ‘오늘은 죽어야지’ 중얼거렸으니까요.”

그렇게 1년이 흘렀을까. 인생은 그에게 강력한 두 번째 펀치를 날렸다. 종종 어지럼증과 두통을 호소하는 아내의 건강이 염려돼 찾은 병원. 그의 아내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순간순간 다 놓고 싶은 충동이 이는 그의 곁에서 “기운 잃지 마. 나 믿지?”라고 씩씩하게 얘기해 주던 아내다. 웬만한 여자 같으면 시각 장애인 남편과 함께할 평생이 두려워 이혼을 요구할 법도 한데, 한결 같은 모습으로 그의 투정과 억지를 다 받아준 아내다. 두 번 세 번 태어나도 어떻게든 찾아 다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아내가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얘기. 게다가 수술 후유증은 1차가 청력 마비,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얘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수술 후 아내는 왼쪽 청력을 잃었어요. 다행히 아직까지 별 탈은 없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태죠. 가끔 아내가 ‘여보, 한쪽 다리가 긁어도 감각이 없어’라고 얘기하는데, 그땐 제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그런 날은 저도, 아내도 말이 없어져요. 침묵하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향한 수많은 위로가 담겨 있죠.” 

고통과 마주하니 희망이 오더라
사랑하는 아내는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1급 시각 장애인이 된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외출할 때 지팡이만 있어도 훨씬 편하고 안전할 텐데,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눈치챌까 봐 지팡이는 서랍 속 깊이 숨겨두었다. 양가 부모님도, 형제나 다름없는 틴틴파이브 멤버들까지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장애를 비밀로 덮었다. 어쨌든 그는 연예인이고, 시각 장애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당장 일이 끊길까 봐 걱정됐기 때문. 하지만 감추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상태를 알려야겠다는 결심은 섰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죠. 그때 눈에 띈 단어가 커밍아웃이었어요. 동성애자나 사용하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다른 뜻도 있더라고요. 커밍아웃은 ‘come out of closer’에서 유래한 단어로, ‘벽장 속에서 나오다’라는 뜻이에요. 한데 그다음에 덧붙은 설명이 절 확 끌어당겼어요. 단순히 ‘알린다’는 의미를 넘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더 이상 폐쇄적이고 비관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는다’는 정의가 절 위로해주더라고요.”

‘나를 알리려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게 먼저’라는 뜻은 그에게 ‘장애가 있는 나를 내가 먼저 안아주는 것, 그게 먼저였어’라는 깨달음을 줬다고. 드디어 그는 자신의 삶과 화해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첫 번째 커밍아웃을, 틴틴파이브 멤버들에게 두 번째 커밍아웃을 시작으로 KBS-2TV 아침 프로그램 <여유만만>과 MBC-TV 휴먼 다큐멘터리 <사랑>에 출연해 개그맨 이동우가 망막색소변성증 환자임을 세상에 밝혔다. ‘병은 병일 뿐인데 뭘 숨기고 밝히고 하느냐’는 힐난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까 우려도 됐고, ‘굳이 묻지 않았어. 궁금하지도 않다니까. 그런데도 줄기차게 말하는 게 우습다’와 같은 자기 비하의 목소리도 슬금슬금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자신의 병을 알리는 게 목적이었고,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나 그처럼 마음 졸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행동하고 싶다는 결심 앞에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저의 진심을 얼마만큼 순수하게 받아들일지 궁금했어요. 한데 방송을 본 시청자들이 ‘당신이 힘이 됩니다. 당신에게서 희망을 봤습니다’라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저의 병을 공개했을 뿐인데 제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도 있다니 놀라웠죠.”

그의 인생 2막 커튼은 그렇게 힘겹게, 그러나 힘차게 열리고 있었다.

웃을 수 있다, 웃을 것이다, 웃는다!
‘나는 시각 장애인입니다’라는 꼬리표인 것만 같아서 오랫동안 서랍 속에 숨겨두었던 지팡이도 꺼냈다. 그에게 지팡이는 온갖 사건 사고에서 그를 지켜주는 도구이자 세상을 보게 해주는 눈. 방송 이후 처음으로 외출하는 날, 땅에 닿는 지팡이의 ‘탁!’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도 새처럼 자유로워졌다. 요즘엔 지팡이를 들고 있으면 콧노래가 나오고 휘파람까지 분다고. 특별히 좋은 일은 없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고 있다. 처음 병을 진단 받던 6년 전에 비해 시력이 점점 나빠져 현재 그의 시야는 5도 미만이다. 망원경으로 보는 것처럼 빛이 드는 작은 구멍 외의 주변은 온통 새까맣다. 어쩌면 앞으로 더 안 좋아져 전맹이 될지도 모르지만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단다. 마음의 눈을 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의 시간을 겪는 사이, 기적 같은 사랑으로 찾아온 딸 지우도 어느덧 다섯 살. 시력을 잃어 딸아이의 커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딸과 단둘이 산으로 계곡으로 여행할 수는 없지만 그 또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무언가를 기대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희망은 줄어듭니다. 인생이 자기 뜻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설령 기대치에 부합되더라도 꼭 행복한 것은 아니죠. 기대 이상을 얻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던 게 예전 저의 모습이라면, 요즘엔 기대하지 않는 버릇을 들이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보니 희망의 부피도 조금 커지더라고요. 불꽃이 꺼져도 불씨가 남아 있는 게 희망이라는 걸 깨았죠. 불씨만 있으면 불은 언제든 지필 수 있잖아요.” 

비록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오늘 그에게 비추어진 5퍼센트의 세상으로 웃고 싶다는 것,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희망 불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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