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물결 속으로 2010년이 사라지다

 

올해를 마무리한다는 상투적인 의식이라 해도 좋았다. 우리 가족은 일몰을 보기 위해 무작정 서해로 달렸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세 개의 다리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겐 아직 낯선 옹진군의 선재도와 영흥도. 섬은 온통 시간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은 바다와 개펄에 은빛 금빛 모래를 뿌려댔고, 사람들 뒷모습에는 기다란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하루가 아니라 올해의 끝을 걷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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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세상이 온통 은빛이더라

▲바닷길이 열리면 사람들은 모랫길을 여유롭게 걷는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오후 시간을 이야기한다.
“친구가 살던 섬인데 해넘이가 환상이래.” 엄마가 얘기한 섬은 서해 옹진군 영흥도다. 지인이 요양 삼아 잠시 살던 동네를 일몰 여행지로 추천한 참이었다. 이름도 낯설고 인터넷을 뒤져도 블로거들의 흔적이 없는 조용한 섬. 그래서인지 불안함과 설렘이 교차했다. 하지만 우리는 만장일치로 ‘고’를 외쳤다. 연말이면 각종 언론사에서 쏟아내는 판박이 같은 ‘일몰 명소’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흥도 여행에는 선재도가 항상 옵션처럼 낀다. 이웃하고 있으니 부담 없이 세트로 둘러볼 수 있다.

서울에서 영흥도까지는 두 시간 남짓 소요됐다. 인천 오이도에서 11킬로미터의 시화방조제를 달리자 대부도, 여기서 550미터의 선재대교를 넘어서자 아담한 선재도에 닿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겨울인 탓에 태양은 벌써 해넘이 준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일몰 여행의 출발은 선재대교 인근에 자리한 목섬에서 시작했다. 예부터 갈매기와 해당화가 많아, 선녀가 춤을 추었다는 선재도(仙才島)의 대표적인 명소다. 때마침 바닷물이 빠지면서 선재도에서 목섬까지 기다란 모랫길이 드러났다. 우리는 선재대교 오른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목섬까지 산책에 나섰다. 신기하게도 질퍽질퍽한 주변 개펄과 달리 바닷길은 모래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걱서걱 모래에 발이 묻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자 서해는 온통 은빛 세상. 마치 큐빅 알맹이를 지천에 뿌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바닷길을 걷는데 갑자기 목섬에 관한 연인들의 전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남녀가 썰물 때 들어가 다음 물때에 맞춰 나온다는, 그 사이 목섬은 연인들의 파라다이스로 활용된다는 닭살 스토리다. 물론 요즘 같은 날씨라면 동행한 아빠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겠지만. “파라다이스? 얼어 죽기 딱 좋겠다!”

바닷바람은 정말이지 매서웠다. 은빛 물결, 겨울 바다의 낭만을 외치던 우리 가족이 얼른 자동차로 피신했을 정도니까 말이다(당시 영하 4도였다). 시야는 환상적이나 볼은 얼얼했고 손끝은 시렸다.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영흥도로 향하는데, 자동차 뒤로 S자 곡선이 물 빠진 개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파도가, 아니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Plus tip  물때, 미리 알아두세요! 

바닷가는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일어난다. 예를 들면 12월 14일에는 오전 3시 57분과 오후 4시 9분에 물이 빠지지만, 21일에는 오전 10시 34분과 오후 11시 17분에 물이 빠진다. 매일 한 시간 남짓 늦어지는 셈. 14일에 가면 개펄과 일몰을, 21일에 가면 바다와 일몰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자신의 여행 계획(바닷가 고랑을 볼지, 바다를 볼 지)에 맞춰 출발 시간을 정해야 한다.

참고 사이트 (badati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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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안에 최고의 학습 공간이 숨어 있었네

5분이나 달렸을까. 우리는 선재대교보다 몸집이 큰 영흥대교로 진입했다. 12킬로미터 길이의 2차선 다리. 2001년 다리가 준공되기 전, 영흥도는 배를 타고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먼’ 섬이었다. 지금은 대부도와 선재도, 영흥도 사이에 다리가 놓이면서 세 섬이 모두 육지의 이웃이 됐다.

영흥도의 볼거리는 크게 네댓 개로 추릴 수 있다. 화력발전소와 에너지파크, 장경리해수욕장, 십리포해수욕장. 여기에 시간이 가능하다면 통일사에 올라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화력발전소다. 영흥화력발전소는 2004년 준공되어 수도권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이다. 섬 여행에 웬 화력발전소 운운하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게다. 하지만 영흥도 일몰 여행에서 화력발전소는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닷가에 솟은 굴뚝, 그곳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가(공해 걱정을 잊는다면) 색다른 경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치 거인이 하늘을 향해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이랄까. 여기에 화력발전소로 가는 길은 영흥도에서 유일한 해안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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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가는 낙조를 추격하다

에너지파크를 나서자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행의 목적, 그러니까 일몰을 오롯이 감상하겠다는 취지를 떠올리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리는 서둘러 한 사이트에서 바다 낙조가 가장 아름답다고 추천한 장경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내륙 도로를 달린지 10분 남짓. 장경리해수욕장은 한적하면서도 쓸쓸했다. 바다에 조금씩 붉은빛 가루가 떨어질수록 바람은 차갑게 불어댔다. 우리는 해수욕장 한쪽에 차를 대놓고 일몰을 감상하기로 했다. 카메라를 챙겨 나서는데 갑자기 엄마와 아빠가 손을 흔들어댔다. 심리사전을 통해 번역하면 ‘잘 다녀와, 우리는 차 안에서 구경할게’쯤 되었다. 아무리 낙조의 감동 운운해도 엄마 아빠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목섬과 화력발전소에서 찬 바람에 호되게 당한(?) 탓이다. 나는 보란 듯이 홀로 한적한 해변에 나섰다. 한없이 펼쳐진 바다와 그 위에 쏟아지는 일몰의 잔영에 취하니, 겨울바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한 홈페이지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일몰이 바다가 아닌 산 너머로 꾸역꾸역 넘어가고 있었다.

일몰 여행을 목표로 삼은 우리 가족은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여기까지 왔으니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를 꼭 보자, 쪽으로 의견이 좁아졌다. 그때부터 몸과 마음이 바빠졌다. 서둘러 자동차에 시동을 켜고 태양의 동태를 살피면서 바닷가로 향했다. 아빠는 중차대한 임무라도 띤 국가 요원처럼 차를 몰아댔고, 해를 좇아 도착한 곳은 30분 전에 떠났던 화력발전소다. 하지만 도로에 안전 철조망이 있어 해넘이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엔 왠지 답답했다. 해는 이미 3분의 2가 떨어진 상태였고 도로 앞의 안전망은 피할 길이 없었다. 순간 아빠가 눈짓으로 이야기했다. ‘도로 뒤 언덕으로 올라가! 우린 차에 있을 테니 네가 대표로 보렴.’사람 심리가 참 신기하다. 눈앞에서 태양이 조금씩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언덕으로 뛰었다. 나는 그제야 우리 가족을 대표해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로등이 켜진 도로를 달리면서 낙조 추격전에 대한 흥분을 떠올리며 깔깔 웃어댔다. 여기에 덧붙여 새해맞이 토크쇼까지 겸했다. 말하자면 새해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 발표였다. 엄마와 나는 (매년 똑같은 소원이지만) 체중 감량을 통해 멋진 옷을 보란 듯 구입하겠다며 입을 모았고, 아빠는 평소 가족의 질타를 받던 까칠한 성격을 개조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정확히 한 시간 뒤, 엄마와 나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빵을 우걱우걱 해치웠으며 아빠는 끼어드는 차량에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새해 다짐이란 게 그렇다. 무산되더라도 상관없는 장밋빛 희망 사항 혹은 새해를 더 벅차게 맞을 수 있는 심리적 묘약. 우리에게 영흥도에서 보낸 일몰 여행은 새해를 더 뜨겁게 맞이할 수 있는, 경인년의 마침표였다.

Plus tip  일몰 여행, 다양하게 즐기세요!

영흥도와 선재도에서는 다양한 일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화력발전소와 목섬, 통일사(사찰)에서는 바닷가 일몰을, 장경리해수욕장에서는 산 너머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영흥도의 일몰 시각(23일 기준)은 오후 5시 21분. 적어도 30분 전부터 일몰 감상에 들어가야 심리적으로 여유롭다.

식사는 영흥도보다 대부도에서! 일몰을 보고 서울로 직행한다면 6시 남짓, 도로 정체를 피할 길이 없다. 이때는 현지에서 여유만만하게 저녁식사와 차를 마시고 느긋하게 출발하는 게 낫다. 추천 메뉴는 바지락칼국수나 조개구이, 굴밥인데 영흥도보다 대부도가 선택의 폭이 훨씬 넓다. 특히 대부도 입구에는 수많은 가게가 경쟁하듯 맛집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미즈내일 박지현(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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