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과학과 발명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4월은 과학의 달이고,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과학의 달과 과학의 날을 맞아 지금부터라도 만사의 중심이 과학기술과 발명이 되어야한다는 계기가 마련되어야겠다.

과학의 날의 원조는 과학데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과학의 날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앞선 과학기술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한 날로서 1967 년 과학기술처가 발족한 일을 기념하여 1968년부터 행사를 개최하였다.

과학데이는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 사망 50주기인 1932년 4월 19일에서 비롯되었다. 이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다윈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고, 당시 우리나라의 과학자와 지식인들은 과학데이를 제정할 것을 결의했다. 일제하에서 하루 빨리 해방되기 위해서는 지식과 과학기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과학데이 제정에 앞장 선 사람은 윤치호-김용관-현상윤-이인 등 당시 조선의 과학자와 지식인 등 37인. 이들 37인은 ‘과학의 황무지인 조선을 과학화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1934년 2월 28일 드디어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과학데이실행회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은 목사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김창제였고, 서기는 강진두 그리고 총무는 김용관이 선임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제정하고 곧이어 기념식-강연회-공장견학-사진전시회-과학지식보급좌담회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해 3월 5일 자 동아일보는 ‘과학데이와 그 사업’이라는 사설을, 같은 날짜의 조선일보는 ‘과학과 조선’이라는 사설을 실었으며, 조선중앙일보는 ‘문화를 통해 큰 도움’이라는 제목으로 ‘과학데이는 과학기술을 보급하는데 큰 뜻이 있다.’고 강조할 정도로 그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과학데이 행사는 과학자는 물론 언론인-종교인-문인-일반인 등 모두가 뜻을 함께한 거국적인 민족운동이었고, 그 속에는 독립의 염원도 꿈틀대고 있었다.

제1회 과학데이 행사는 일반인에게 과학을 인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저명인사들이 참가한 과학지식보급회가 결성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과학지식보급회가 1934년 7월 창립총회를 열고 과학지식 보급운동을 벌이기로 하면서 1935년 제2회 과학데이 행사는 더욱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부민관(옛 태평로 국회의사당)에서 행사가 열리기 직전 과학데이 깃발을 앞세운 54대의 자동차가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서울뿐 아니라 과학지식보급회의 지부가 있었던 평양-원산-신천에서도 과학데이 행사가 열렸다.

1936년 제3회 과학데이 행사는 전국에서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일제가 과학데이를 핑계로 민족운동을 전개한다는 이유로 1937년 과학데이 행사의 옥외 개최를 금지하고, 1938년에는 김용관 등을 투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에는 제6회 과학데이 행사를 맞아 용산 철도국공장과 영등포에 있는 기린맥주와 경성방직 등을 견학했다. 하지만 1940년 이후부터는 또다시 일제의 탄압으로 과학데이 행사를 개최하지 못했다. 이처럼 선조들의 과학과 발명에 대한 열기는 용광로보다도 뜨거웠고, 그 뜨거운 열기는 우리나라가 산업재산권 출원 세계 4위로 뛰어오를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올해로 4월 21일 과학의 날은 53회를 맞는다. 과학의 달과 과학의 날을 맞아 과학기술과 발명의 중요성을 깨달아 정부와 기업은 이 분야에 투자를 과감히 늘려 코로나 19와 같은 바이러스 감염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기대해본다.

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前 유원대 발명특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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