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지어 춤추는 갈대와 동백나무 숲

 

여행 일정을 잡고 가장 촉각을 세운 것은 날씨 정보였다. 냉동 창고 같은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니 웬만한 추위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한 날 예상 기온은 영하 12도. 게다가 눈발이 날릴 가능성도 있다는 말에 실망을 감추지 못한 딸아이. 책상에서 해방될 며칠을 기대했을 텐데 취소될까 걱정이었나 보다. 든든하게 내복 입고 추위와 맞선 우리는 겨울 철새와 바다를 볼 수 있는 충청남도 서천으로 깨알 같은 재미를 찾아 떠났다.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전설의 동백나무 숲

 
서천 마량리는 서해안이지만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량리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가 언덕을 따라 울창한 숲을 이루기 때문이다. 찬 바람을 맞으며 언덕을 올라가야 하지만 소요 시간은 약 3분. 잘 다듬어진 돌계단이라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3월 하순에 붉은 꽃을 터뜨리기 위해 웅크린 꽃망울을 찾으며 오르다 보면 금세 정상에 도착한다. 단아한 동백정에서 잔잔한 서해를 내려다보니 시간이 멈춘 듯하다. 500년 전 수군첨사가 바닷가에 있는 꽃 뭉치를 증식시키면 마을이 번성할 것이라는 꿈을 꾸고 꽃을 증식시킨 것이 마량리 동백나무  숲의 시작이다. 그 뒤로 마을의 안녕과 바다에서 무탈을 빌기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차가운 바람에 맞서 있었지만 발에 밟히는 누런 잔디의 촉감이 유독 부드러워 마음은 내내 평온했다. 또 동백나무 뒤편에 호위 군사처럼 서 있는 소나무 숲을 걷고 있으니 바다를 바라보며 삼림욕을 하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근거리에 있는 화력발전소. 물론 필요에 의해 그곳에 건설되었겠지만 신비로운 전설이 있는 동백나무 숲과 대형 콘크리트건물의 부조화가 둘러보는 내내 아쉬웠다.   

장엄한 철새의 군무를 찾아

 
서천군 조류생태전시관은 금강 하구에 있다. 일반 전시관처럼 철새 모형을 전시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 총 3층 규모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구석구석 철새에 대한 정보를 지루하지 않게 전시했다. 3층의 버드하우스는 금강의 대표적인 철새들을 캐릭터로 만들고 센서를 부착해 사람이 다가가면 반응한다. 큰기러기를 할머니로, 가창오리와 고니, 검은머리물떼새, 청둥오리를 4인 가족으로 구성해 자신의 특징을 소개하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깜찍하고 귀여워 웃음이 난다. 추운 날씨 때문에 전시관에서 만난 관람객은 10여 명. 덕분에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사진 촬영하며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은 철새의 비행을 주제로 한 4D 입체 영상 체험이다. 새의 비행 각도에 맞춰 좌석이 흔들리고 바람도 나와 실감 났다. 아담한 규모인 4인 정원, 상영 시간은 4분 30초. 짧은 상영 시간은 새처럼 비상하다 바로 추락(?)한 느낌이었다. 딸아이와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철새의 웅장한 군무를 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으나 이내 실망했다. 오후 5시경이면 철새의 군무를 볼 수 있다는 사전 조사를 했지만, 금강이 꽁꽁 얼어 철새들은 남쪽으로 이동한 상태. 국내 최대 철새 도래지인 금강 변에서 조형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 올 한 올 장인 정신 담은 한산모시

서천군을 대표하는 제품을 꼽으라면 단연 한산모시다. 많은 사람들이 ‘한산’이 브랜드 이름인 줄 알지만 지명이다. 이 지역에서는 생육 조건에 적합한 모시풀(저마)을 이용해 옷감을 만들었다. 한산모시관은 오래전부터 유래한 모시의 직조 과정을 전시한 곳으로, 시연도 볼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시연은 안채라 불리는 건물에서 볼 수 있다. 유리문을 통해 머리만 들이밀고 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수확한 모시를 전처리 과정을 거친 후 햇볕에 말려 태모시로 만든다. 이 태모시를 치아로 쪼개는 모시 째기와 한 올씩 연결하는 모시 삼기가 시연 중이었다. 시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베틀로 짜서 옷감으로 만든다. 라디오 방송을 친구 삼아 시연 중이던 김순자·이순형 할머니는 어색한 듯 서 있는 우리 가족을 앉으라며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신기하지? 이게 모시여. 이걸 하나씩 이어서 짜야 해.”

처음 보는 광경에 마냥 신기해하는 우리 가족에게 직접 만져보라고 권유한다. 까슬까슬한 줄기처럼 거칠어진 손과 능숙한 손놀림을 마냥 보고 있으니 딸아이가 조용히 속삭인다.

“할머니 두 분이 달인 같아요.”

“옛날에는 낮에 밭일하고 밤에 모시를 짰지. 베를 짜면 얼마나 더운지.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 문화재라던데? 하하.”

손사래를 치며 사양해 사진 촬영은 할 수 없었지만 세월을 담은 모습은 오래도록 남았다. 또 다른 공방 유리 벽 너머로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베틀로 모시 짜는 모습이 보인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다지만, 작업에 방해가 될까 봐 밖에서 보기로 했다.

모시 제품 전시실을 겸한 판매처로 가보니 양말을 비롯해 이불, 한복, 모시차 등 다양한 제품이 있었다. 천연 염색으로 고운 색을 뽐내 사고 싶을 정도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정도로 고가라 눈만 호강했다. 

광활한 갈대밭에서 길을 잃다 

우리나라 김 생산의 70~80퍼센트를 차지하는 서천에서 재래식 손김 만들기는 색다른 체험이다. 예전의 수작업 방식으로 김을 생산하기도 하고,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구제역과 조류독감 때문에 체험객을 받지 않았다. 상시 체험이 아니라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손김은 김발에 김의 원초를 잘라 고루 펴는데, 기계로 만든 김에 비해 구멍도 많고 투박하지만 향은 진하다고 한다. 재래식 손김 만들기 체험을 운영하는 박양순씨는 “기름을 바르지 않고 구워 달래 간장을 올려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체험하지 못한 아쉬움을 읽었는지 비닐하우스에서 말리던 김 한 장을 떼어주며 맛보라고 한다. 연탄난로에 구운 김 맛을 보더니 남편은 대뜸 사자고 부추긴다. 김 시식에 이은 판매 전략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일반 김이 100장 기준으로 5천 원 선이라면 손김은 1만5천 원이다. 집에 돌아와서 설명대로 먹으니 일반 김에 비해 짙은 바다 향이 입 안에 맴돌았다.

금강 변에 있는 갈대밭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다. 총면적은 33만 제곱미터인데 자연 훼손을 염려해 약 7만3천 제곱미터만 공원으로 조성했다. 금빛 물결 마당, 신성리 나루, 포토존, 강변 전망대, 영화 테마길 등 테마별로 나뉘어 재미있다. 광활한 갈대숲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눈발이 날렸다. 이제 막 도착했는데 발길을 돌릴 수 없어 꽁꽁 싸매고 갈대숲으로 내려갔다. 표지판이 있지만 키 큰 갈대밭에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헤매기 십상이다. 입구에 있는 안내를 숙지하고 노선을 정하면 갔던 곳을 다시 가는 낭패를 면할 수 있다. 영하의 날씨에도 관람객이 속속 도착했지만, 워낙 넓은 장소라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갈대숲 사이로 느리게 걷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매서운 강바람 때문에 자연스럽게 걸음이 빨라진다. 이래저래 겨울 여행은 손해다. 다른 곳과 달리 갈대밭은 유독 아쉬움이 남아 날이 풀리면 다시 오기로 약속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운함에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운다.

“날 풀리면 어디로 갈까?” 

미즈내일 최은영 리포터 solc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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