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속 인물 이야기 - 섬진강 시인 김용택

 

한반도의 봄은 섬진강을 따라 올라옵니다. 전북 진안군 팔공산에서 시작해 전남 광양 앞바다에 안착할 때까지 530리 길을 쉬지 않고 흐르는 섬진강(蟾津江), 남도의 젖줄인 섬진강 품에서 뽀얀 재첩이 알알이 영글어가듯 섬진강에 서면 시인의 숨결로 생각이 영글어갑니다.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샛노란 산수유가 돌담과 어우러지면 봄이 옵니다. 이에 질세라  청매실농원은 희디흰 매화꽃을 피웁니다. 그러면 괜스레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봄이 되면 여자는 마음이 흔들린다 합니다. 봄처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과 흡사한가 봅니다. 갑자기 매화꽃 향과 더불어 보고픈 사람이 생각납니다. 단단하게 옹이가 박힌 나무 같기도 하고, 올곧은 책장 같기고 하고, 말 안 듣는 사내아이 같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매화꽃이 난분분 날리는 섬진강가에 살고 있습니다. 초록의 보리 위로 떨어지며 날리는 흰 매화꽃 잎이 참으로 황홀해 넋을 놓았던 그 섬진강가 말입니다.

매화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라는 김용택 시인의 시입니다. 저는 순간 김용택 시인과 제가 같은 공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광경을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했습니다. 마치 나란히 서서 생각을 맞춰보는 듯했으니까요.

그 전에도 이 시를 본 적이 있지만 그리 감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라는 구절을 읽을 때 그날 시인의 심기가 불편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기억 때문에 서럽다고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겨울에 함박눈이 가지마다 달린 듯, 수백 가마 팝콘을 하늘에서 쏟아 붓듯 송이송이 매화 꽃은 황홀했습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매화 꽃잎은 몽환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저도 무척이나 서러웠습니다.

섬진강가에서 태어나 자라고 시를 짓는 시인

 
흔히 김용택 시인을 ‘섬진강 시인’이라 합니다. “섬진강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김용택 시인은 전북 임실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순창농고를 졸업했습니다. 이듬해 교사 시험을 보고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자신의 모교인 임실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습니다. 1982년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요.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시는 대부분 섬진강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는 섬진강에 대해 “나의 모든 글은 거기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고 끝이 날 것을 믿으며 내 시는 이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그루 나무이기를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그를 섬진강 시인이라 칭하니 너무나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는 교과서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학생이 18명밖에 되지 않던 마암분교에서 아이들과 공을 차고 시를 지으며 <학교야 공 차자> <촌아 울지 마> 등을 냈고, 이것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김용택 시인의 작품은 초등학교 3, 5, 6학년 국어 교과서에 동시 한 편씩이, 중학교 2학년 <생활국어>에 시와 산문 한 편씩이 실렸습니다. 고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고 박완서 선생의 단편 ‘그 여자네 집’이 실리면서 그 소설에 인용된 같은 제목의 김 시인 시가 수록되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동시들은 모두 그의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사는 시인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가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아이들과 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그 시인을 찾아 시인의 생가(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로 갑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자욱한 물안개와 악양 들판의 웃자란 보리 싹과 알싸한 두엄 내음이 납니다. 바람에 사각거리는 대숲과 강변 백사장 위로 내려앉는 해거름도 함께 합니다. 그렇게 도착하는 시인의 서재는 늘 열려 있습니다. 시인은 이퇴계 선생의 시를 따서 ‘관란헌(觀瀾軒)’이란 별칭을 붙였습니다. ‘마루에서 물결을 바라보는 집’이란 뜻입니다. 담이 낮아 정말로 섬진강 자락이 보입니다. 2002년부터 덕치초등학교에 있다가 2008년 8월 31일자로 정년퇴직해 지금은 전주를 오가며 이곳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관란헌에 앉아 집 앞을 지나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고, 제 키보다 큰 자전거를 끌고 온 이웃집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저 맘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이웃집 삼촌 같습니다. 소박한 문패와 흙이 잔뜩 묻은 장화, 저녁 마실 다니기 좋은 슬리퍼가 마루 밑에 있고 허름한 장독대 위에 간장 단지, 된장 단지가 봄 햇살에 졸고 있습니다. 동네 여느 농가와 다를 바 없는 풍광입니다. 다만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과 책상 위의 쓰다 만 원고, 서재 입구의 ‘관란헌’ 현판만이 시인의 집임을 말해줍니다.

관란헌에서 섬진강가로 나오는 길목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시인이 어릴 적엔 여리고 배리배리한 나무였다 합니다. 빨리 크라고 자다가 일어나 오줌을 누어주고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며 키운 나무는 이제 시인의 키에 몇 배가 될 만큼 자랐고, 시인의 마음 또한 그만큼 자랐다고 합니다. 정든 나무를 한번 보듬어주며 눈길을 돌리면 햇살 부딪는 섬진강이 아담합니다. 그곳에는 그만큼 아담한 돌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아이들 건너기 좋으라고 시인이 놓은 것입니다. 결국 시인도 동네 사람들도 모두 편히 건넙니다. 시인은 한 말을 보탭니다. “세상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눈을 맑게 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시와 시인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을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강’이라 했습니다. 끈질긴 민초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섬진강가에 오늘처럼 봄이 오면 김 시인의 시에서처럼 매화 꽃잎이 흩날립니다. 하얀 눈송이처럼 흩어지는 매화꽃 향이 물속까지 닿고, 똑똑똑 산수유 노란 향이 노크를 하면 자잘한 재첩들은 봄 기지개를 펴지요.

그러면 섬진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재첩 맞을 준비를 합니다. 물옷이라 부르는 몸 장화를 갖춰 입고 망태기와 ‘거랭이’를 들고 발 굵은 체 ‘아미’와 플라스틱 소쿠리를 챙깁니다.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맑은 섬진강 강바닥 모래를 거랭이로 긁어 물에 띄운 소쿠리에 쏟아 붓습니다. 소쿠리로 강물을 일어 모래는 버리고 재첩만 남기지요. 다시 그 재첩을 아미로 걸러, 크기가 5밀리미터 이하인 것은 강으로 돌려주고 사람이 취할 것만 취합니다.

그 재첩으로 끓인 국 한 그릇이면 헛헛해진 속이 시원하게 풀리고 배가 불룩해지며 불끈 힘이 납니다. 눈을 맑게 하고, 자극이 없으면서도 감칠맛은 진하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재첩국. 필수아미노산인 메티오닌이 많아 조혈(造血)과 해독에 좋으니 김용택 시인은 재첩국 같은 사람입니다. 눈을 맑게 하고 세상에 찌든 마음을 해독하듯 정화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샘솟게 합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집니다. 섬진강 시인이며 재첩국 같은 남자에게 섬진강은 무엇일까요? 누구보다 섬진강을 사랑하고, 섬진강을 잘 아는 김용택 시인이 생각하는 섬진강을 무엇일까요? 잠시 그가 쓴 시를 뒤져봅니다.

…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            (‘섬진강 1’ 중에서)

어디엔가 “섬진강은 사람과 함께 흐른다”고도 했습니다. 이제 섬진강가에 서서 다시 한 번 섬진강과 흩날리는 매화 꽃잎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를 다시 되뇌어봅니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Tip  알아두면 좋은 여행 정보

■ 찾아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순천 방면으로 가다가 하동 IC에서 빠진다. 19번 도로를 따라 하동 방향으로 진행한다. 섬진강의 오른쪽으로는 19번 도로가, 왼쪽으로 861번 도로가 섬진강을 따라 올라간다. 사이사이 다리를 넘나들며 섬진강을 보듬어보자.

■ 재첩 맛있는 집 하동읍 신기리 상저구에 있는 부두횟집(055-883-8288), 하동읍에 있는 여여식당(055-884-0080), 우회 도로변에 있는 동흥식당(055-884-2257) 등이 유명하다.

■ 주변 관광지 하동에서 구례로 향하는 길에는 ‘토지’의 배경인 최 참판 댁과 악양 들판이 있고 남도대교 근처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경상도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장을 보던 화개장터가 있다. 섬진강을 따라 더 오르면 운조루와 화엄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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