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지는 단양. 단양팔경으로 유명하고, 많은 이야기를 담은 곳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마다 전설 하나쯤 있지만 소도시에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보따리는 푸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전설처럼 정감 어리고 소박한 이야기를 담아 오래된 동화책 같은 곳.

우리 가족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조용히 흐르는 남한강변으로 떠났다.  

구인사 사찰의 규모에 압도당하다

 
불자가 아닌데도 여행 중 사찰을 찾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내기도 조심스러운 고즈넉한 풍경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구인사는 이런 분위기와 전혀 다른 곳이다. 규모가 큰 절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가본 사찰 중 양양의 낙산사가 가장 큰 규모였으나 구인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간혹 김장철이면 TV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김장을 하는 모습이 장관인 구인사는 입구에 버스터미널, 우체국, 은행이 있을 정도다. 차가 갈 수 있는 곳은 주차장까지. 그곳부터 걸어야 한다. 사전 정보가 없었던 탓에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지만 이내 가파른 경사에 숨이 차올랐다. 약 20분을 걸어서 눈앞에 보이는 천왕문을 지나니 지금껏 봐온 사찰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화려한 단청과 4~5층 건물. 협곡을 지나듯 모퉁이를 돌면 양옆으로 또 다른 건물들이 나타나는데 해발 600미터에 총 40여 동이 있다. 1945년에 건립되었고 1966년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지었다는데, 오를수록 경사는 심해지고 걷는 속도는 느려져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의 다 왔어요. 3분만 가면 시원한 약수를 마실 수 있어.”

마침 들고 온 생수도 바닥이 났고, 정말 3분일까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드디어 약수를 마시는데 우리 가족의 몰골(?)은 출발할 때와 달랐다. 누가 보면 마라톤이라도 하고 온 듯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의자도 아닌 계단에 털썩 앉아 숨을 돌리는데 옆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택시 타고 오길 정말 잘했어. 여길 걸어왔다고 생각하면 끔찍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무려 한 시간이나 이를 악물고 걸어왔건만 택시라니. 순간 하늘이 노래지고 남아 있던 힘마저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얘기인 즉, 구인사로 가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우리 가족처럼 무작정 걸어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차장에서 택시를 타는 것이란다. 구인사 반대편으로 오르는 길인데 정상까지 쉽게 갈 수 있고 내려오면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것. 택시비는 거리에 관계없이 1만 2천 원이란다. 이런 기분을 허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게다. 지나간 일은 후회해봤자 소용없고, 사전 조사의 필요성을 다시 느꼈다.

그림 같은 풍광에 넋을 놓다

 

다음 목적지는 도담삼봉관광지. 남한강 중심에 우뚝 솟은 세 봉우리인데, 가운데 봉우리에는 작은 정자도 있다. 맑은 물에 고스란히 비친 모습이 마치 미술 시간에 배운 데칼코마니 같다. 봉우리의 크기는 다 달랐다. 전설에 따르면 가운데 봉우리는 남편, 정자 맞은편의 봉우리는 아들을 얻기 위해 들인 첩이란다. 나머지 봉우리 하나는 그런 둘을 보기 싫어 등을 돌린 부인이라고.

특히 가운데 봉우리에 있는 정자는 조선 시대 정도전이 지어 풍류를 감상했고, 자신의 호도 삼봉이라 할 정도로 사랑한 곳. 그래서인지 관광지 안에 정도전 동상도 있다. 도담삼봉을 뒤로하고 약 200미터를 올라가면 석문을 볼 수 있다. 원래 석회동굴이었는데 동굴이 무너지고 입구만 남았다고 한다. 거리는 200미터라지만 가파른 계단 앞에 세 식구는 얼음이 되었다. 구인사에서 호되게(?) 다리운동을 한 탓에 도저히 갈 수 없노라고 손사래 치는 남편과 딸아이 덕분에 결국 가지 못했다. 이왕 왔으니 다 보고 가야 한다는 철칙이었지만 내심 강한 거부가 반가웠다.

여행의 묘미는 별미 맛보기. 단양의 특산물은 육쪽마늘이다. 그래서인지 단양읍에는 마늘 상설 시장도 있고, 마늘정식을 판매하는 식당도 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돌집식당(043-423-4949)에서 마늘정식을 먹기로 했다. 가격은 1만~2만 원. 호박죽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한 상 가득 찬이 차려지고 기대하던 돌솥밥도 나왔다. 튀긴 마늘과 여러 소스에 버무린 마늘, 돌솥밥에도 곤드레나물과 마늘이 있다. 마늘과 곤드레나물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어 아쉬웠지만 깔끔한 반찬으로 만회되었다.

자동차 타고 수억 년 전으로 떠난 여행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쉽게 구하기 위해 강가에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를 증명해주는 곳이 단양이다. 남한강변 수양개마을은 구석기부터 삼한 시대까지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총 3개 지구를 약 20년에 걸쳐 발굴했고, 그 자취를 전시한 곳이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이다. 집터와 토기, 동굴 유적 등 다양한 유물과 유물 발견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

다른 곳과 달리 딸아이가 유독 관심 있게 보았는데 사회 시간에 배울 역사 때문이라고. 어릴 때는 박물관에 가도 설명해주느라 힘들었는데 이제는 필요하니 알아서 챙긴다. 어른들이 ‘다 때가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실내 전시를 보고 야외 산책로를 따라가면 넓은 잔디밭에 사냥하는 모습과 생활상을 동상으로 재현했다. 주말인데도 관람객은 없는 편이었다.

온달장군의 무용담이 전해지는 온달산성은 드라마 세트장과 온달동굴, 온달전시관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온달관광지 안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드라마 세트장은 촬영 후 세심한 관리가 없다면 계절에 상관없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라 반갑지 않다. 그래서 드라마 세트장은 가볍게 패스하고 온달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온달산성 아래 있어 온달동굴이라 불리는데,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천연 동굴로 생성 연도는 최장 4억5천 년 전으로 추정되며 총 길이가 760미터다. 입구에서 안전모를 쓰고 들어서면 훈훈한 온기와 함께 습한 기운이 올라온다.

온달동굴을 걷다 보면 만나는 산책로에는 하얀 조약돌이 쌓여 있다. 가까이서 보니 소원을 적어 올려놓았다. 대부분의 소원은 가족의 건강, 간혹 로또 대박이라고 쓴 것도 보인다. 우리도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조약돌 하나씩 들고 등을 맞댄 채 소원을 꼭꼭 눌러 적었다. 맑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조약돌을 올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숲 속에서 찾은 책 세상

 
단양을 여행지로 정하면서 다른 곳은 몰라도 꼭 가고 싶은 곳이 새한서점이었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앞에서 30년 넘게 서점을 운영하다가 단양에 새로이 터를 잡은 서점이다. 처음에는 마을 입구의 폐교에서 서점을 차렸지만, 경제적 압박에 다시 옮긴 곳은 10분가량 비포장도로를 지나야 한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서점이 있을까 의심이 생길 정도로 후미진 곳이다. 물론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길을 못 찾아 전화 통화 후 겨우 찾았다.

나무판자와 파란 포장천으로 마무리한 서점은 새 책보다 헌책이 많다. 조용한 산골에 폭 싸인 서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금석 대표가 책 정리를 하다 맞이한다. “먼 길 왔는데 차부터 한잔해요.”

타닥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를 내는 난로를 가운데 두고 마신 커피는 참 맛났다.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라는데 두 동에 나눠진 책의 수량은 약 13만 권. 옮기는 데만 8개월 이상 걸렸단다. 숲 속 헌책방이라는 이슈로 방송에도, 신문 기사에도 몇 번 실린 덕에 물어가며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난겨울 참 추웠죠? 영하 15도 이하로 기온이 떨어지는데도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나야 늘 고맙죠. 호기심에 오는 경우가 많지만 찬찬히 둘러보다 책을 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잔잔한 음악 대신 서점 옆 개울물이 소리를 내고 단정하게 차려 입은 북마스터도 없다. 교과서부터 전문 서적까지 분류해 시간만 투자하면 보물을 찾을 수 있다. 우리 가족은 각자 흩어져 책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휴대폰으로 연락해 다시 모인 각자의 손에는 책이 서너 권 씩 들려 있었다. 책마다 정가가 붙어 있지만 제값을 다 받지는 않는다. 새것에 익숙한 아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미즈내일 최은영 리포터 solc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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