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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세대 커피 명인, ‘보헤미안’ 박이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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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4.20  17: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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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팅 마술로 빚는 행복의 맛

   
 

“당신은 어떤 커피를 좋아하시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잠시나마 고민에 빠지게 마련이죠. 인스턴트 봉지 커피를, 별다방(스타벅스)과 콩다방(커피빈)의 커피를 꼽을 수도 있지요. 물론 커피는 취향입니다. 달짝지근한 다방 커피를 좋아하든, 우유 거품과 시럽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커피를 좋아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취향을 넘어 누구나 인정하는 ‘커피 맛’이 있습니다. 커피 때문에 웃고 커피 때문에 살며 그래서 행복하다는, 그 사람이 만든 커피 말입니다. 국내 1세대 커피 명인 박이추 선생을 만나러 강릉에 갔습니다. 커피가 주는 여유와 감동, 함께 느껴 보실래요?

나는 몰래 손님들을 훔쳐봅니다.
어떻게 커피를 마시는지 설렘으로, 두려움으로 몇 번의 눈길을 보냅니다. 가게 문을 나서는 뒷모습과 비워낸 커피 잔까지…
그깟 음료에 무어 그리 신경을 쓰냐고요? 손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 정직과 직면이 아닐는지요.

그에게 커피를 뽑는다는 것은 뜨거운 물속에서 조용히 변화되는 진실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일치점과 만났을 때 훌륭한 커피가 완성된다. 잘 뽑아야 한다는 생각도 욕심이다. 커피는 뽑는 사람의 기분이나 그 사람의 성격까지 고스란히 녹아 있어 늘 놀라울 뿐이다.

“커피를 뽑는다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뽑는다’가 아니라 ‘맛을 낸다’가 맞아요. 이것이 커피와 관계된 모든 기쁨의 시작이죠. 커피 맛도, 그 기쁨도 모르고 커피를 뽑는다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요?”

10년 전 강릉에 정착한 ‘보헤미안’ 박이추(60) 대표. 그는 늘 커피콩을 볶으며 커피와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커피를 사랑함으로써 그 안에 행복을 고스란히 녹일 수 있을 테니까.

박 대표는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커피 전문가다. 2000년대 초반 한국스페셜티커피협회(SCAA)에서 한국 커피 역사의 맥을 지켜온 명인들에게 ‘1서3박’(고 서정달, 고 박원준, 고 박상홍, 박이추)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박이추 대표는 1서3박 중 유일하게 생존하는 1세대 커피 명인. 그래서일까? 그의 카페에 들어서면 구수한 커피 향이 유독 진하게 배어 나온다. 사실 그곳에 들어서기 전, 특유의 향에 입과 코는 카페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손님들의 마음을 흔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사나흘에 한 번씩 커피콩을 볶는다. 가스 불 위에 원통을 올려 돌리는 다소 고전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불 위에서 원통을 돌리는 속도와 시간, 커피를 볶은 상태, 콩을 분쇄하는 방법, 물의 종류와 온도 등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져요. 그래서 모든 작업을 직접 하죠.”

그는 커피를 ‘추적한다’는 말을 즐겨 쓴다고. 맹목적으로 좋은 커피 맛을 찾는다는 것인지… 책을 통하든, 실전을 통하든 끊임없이 커피를 공부한다는 뜻이란다. 커피와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넘지만, 여전히 커피 볶기를 수없이 되풀이하고 볶은 커피를 일본까지 보내 검증받는 일도 마다치 않는다. 그의 이런 커피에 대한 집착이 서울에서, 제주에서, 부산에서 이곳을 찾게 하는 마력이 아닐까 싶다.

커피가 강릉으로 간 이유?

커피 명인으로 신봉되는 그가 높은 매출이 보장되는 대도시를 마다하고 굳이 강릉으로 간 이유가 궁금하다.

“커피를 제대로 만들려면 인간이 돼야 합니다.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마시려면 몸과 마음, 커피가 하나 돼야 하니까요. 뭐든 기술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요즘은 커피를 만드는 사람들이 한 잔의 커피보다 100잔의 커피에 비중을 두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에 커피숍을 열었다. 재일 동포인 그는 1950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났다. 목장 일을 배워 1979년 귀국, 경기도 포천에서 목장을 시작했다. 처음 목장을 한 건 평화로운 목동의 삶을 기대했기 때문. 하지만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평생을 즐기며 할 일’을 찾던 그는 1980년대 중반 커피를 만났다. 외식업 경영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서 학원에 다녔는데, 커피 관련 강좌가 흥미를 끈 것.

“1986년인가요? 우연히 일본의 한 잡지에서 유나이티드 커피 회장이 쓴 ‘한국의 다방’이라는 글을 읽었어요. 요즘은 모습을 감춘 난다랑이나 자뎅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거다 싶었죠. 마침 당시 한국에 카페 열풍이 불었고요.”

카페 창업을 결심한 그는 신주쿠의 커피 전문 학원, 유나이티드 커피 회사 등에서 개인 교습을 받는 등 본격적으로 커피 공부에 들어갔다. 1986년 한국으로 돌아와 3년 동안 준비 기간을 거쳐 1989년 혜화동 로터리에 ‘보헤미안’을 열었다.

“카페 열풍에 힘입어 돈은 좀 벌었죠. 한데 대학로는 커피와 어울리지 않았어요. 민주화 기운이 피어오르던 시점이라 하루에도 수차례 최루탄과 화염병의 연기에 휩싸였죠.”

안암동 고려대학교 앞으로 가게를 옮겼지만 마찬가지. 매출을 위해서는 대학가가 안성맞춤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 글귀 보세요. ‘능력 있는 정신의 소유자! 지식과 교양이 온몸에 배어 있으면서 진솔한 야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현대적 보헤미안이라 부른다’고 적혀 있죠?”

가게 이름처럼 보헤미안 같은 삶은 박 대표의 삶이 됐다. 커피와 어울리는 곳을 찾아 강원도 경포대로, 그리고 영진리로 자리를 옮기면서 비로소 커피다운 커피 맛을 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간의 커피는 평범한 음료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손님이 아닌 ‘팬’에게 커피를 보내다

강릉에 터를 잡은 지 10년. 매출은 예전만 못 하지만, 커피를 더욱 사랑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단다. 마땅한 대중교통 하나 없는 외딴 시골 마을까지 오직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으니 매출이 대수롭겠나 싶다. 보헤미안의 어느 손님에게 어떤 연유로 이곳을 찾았느냐고 물으니 커피가 아닌 행복을 마시기 위함이라 답한다.

동해의 풍경과 어우러진 박이추 대표의 ‘커피 작품’을 보노라면 머리와 가슴이 풍요로워지고, 행복이 온몸으로 퍼진다고 말한다. 박 대표는 이렇게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손님’ 대신 ‘팬’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리고 열성 팬들을 위해 팬 서비스를 잊지 않는다. 볶은 지 며칠 안 된 커피콩은 도시의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만의 철학이 담긴 개성 있는 블렌딩과 추출은 이곳이 아니고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진귀함이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그는 수시로 주방에 불려갔다. “커피 준비되었습니다”라고 직원이 호출하면 부리나케 주방으로 들어가 진한 갈색의 핸드 드립 커피를 만들어 냈다. 손목 인대가 늘어나 붕대를 감는 일이 허다하지만, 그는 직접 커피 뽑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커피를 그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하는데 개의치 않아요. 커피에는 사람을 사로잡는 에너지가 있거든요. 그리고 진실이 숨어 있고요. 사람들을 나른하게 만들지만 명료하게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이 커피죠. 제가 뽑은 커피를 마시며 나른함이든 명료함이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커피를 아는 자, 행복을 아는 자

커피를 아는 자, 자신을 낮추는 자. 그의 옹골진 커피 철학은 강릉을 대표적인 커피 도시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했다. 그의 명성을 좇아 하나 둘 제자 되기를 자처한 이들이 커피 전문점을 열었고, 여행객 사이에서 입소문 나면서 재작년부터는 커피 축제까지 시작됐다. 이렇듯 커피에 있어 절대 지존인 그에게 동네 상권까지 파고들며 우후죽순 생겨나는 커피 전문점이 갖는 의미를 물었다.

“예전에는 숨어서 커피콩을 볶으며 내공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본질은 없고 드러내기 위해 커피콩을 볶아요. 커피 뽑는 일을 기계가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입니다. 맛있고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오랫 동안 고난도의 기술을 쌓아야 하는데요.”

그는 대학이나 평생교육원 커피 전문가 과정 강의를 하면서도 수강생들의 맹목적 커피 전문점 창업에는 부정적이다. 창업을 위한 커피 지식이 아닌 커피를 위한 진실을 알려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 처음부터 상업적인 목적에만 치중하다 보면 커피 본연의 힘, ‘행복’을 깨닫기 전 폐업할게 분명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자신의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현재를 살지만 자신은 미래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얘기인 즉, 한 번 온 손님이 다시 찾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단다. 오늘의 손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늘 최선을 다한다. 그냥 커피가 좋아서 다시 보헤미안을 찾는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다른 사람을 데려오는 것도 필요 없다. 커피가 좋다면 혼자라도 기꺼이 찾을 테니까….

그의 말을 듣고 카페를 둘러보니 창가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의 커피에는 넓은 카페에서 홀로 마셔도 절대 주눅 들지 않는 힘이 있었다. 진지함을 버무린 로스팅과 묵직한 추출의 힘이 향기로 기화돼 고독한 시간을 기꺼이 즐기며 자기 성찰이라는 선물을 주는 게 분명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박이추표 ‘보헤미안 블렌딩 커피’ 세 봉을 샀다. 한 봉은 사랑하는 후배에게, 한 봉은 또 다른 사랑하는 선배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봉은 누구보다 사랑하고 싶은 나를 위해서. 집으로 돌아와 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내내 ‘보헤미안 블렌딩 커피’는 방 안에 깊고 그윽한 향기를 뿜으며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커피를 아는 자, 행복을 아는 자”라고…. 

심정민 리포터 request08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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