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으로 떠나는 교과서 여행

수덕사

지나간 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정사인지 야사인지 구별되지 않는 이야기들 속에 역사가 살아 숨 쉬니
오늘은 야사 같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권력, 그 상황과 영향을 짚어보자.

“엄마 풍수가 뭐예요?”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6학년 큰아이가 묻는다.

음, 풍수지리…. 아이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소라가 지금 사회, 과학, 국어 이런 과목을 배우고 익히듯 우리 선조들은 풍수지리학이라는 걸 배우고 익혀서 생활에 적용했단다. 한문으로 바람 풍(風), 물 수(水). 그러니까 풍수지리학이란 바람과 물의 흐름을 관찰해 길지(吉地)를 찾는 학문이지. 길지란 자연의 생명력[生氣]이 왕성한 곳을 말하는데, 이런 곳에 조상의 묘를 쓰거나 집을 짓고 살면 자신 또는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게 된다는 학문이고 믿음이지. 길지는 말 그대로 풍수를 통해, 즉 바람과 물, 산의 모양새 등을 보고 알아낸단다.”

“풍수지리학은 전해오는 학문이고, 일종의 통계라고도 볼 수 있으니 정확한 답을 얘기하기는 쉽지 않아. 하지만 풍수지리는 생활 속 깊이 뿌리 내린 것이라 임금님부터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풍수지리를 염두에 두고 생활했지.”

“임금님도요? 설마요?”

“정말이야. 임금님도 풍수지리를 믿고 따랐어. 심지어 묘를 잘 써서 왕이 된 이야기도 있는걸! 들려줄까?”

“좋아요. 재밌겠다!”

“너희 흥선대원군 알지? 조선 말에 쇄국정치를 편 할아버지 말이야.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의 아버지시지.”

“알아요. 척화비를 세웠다는 그분 말이죠?”

“잘 아는구나. 그분 얘기를 해줄게. 그럼 충북 예산으로 가야겠는걸?”


예당호 조각공원의 멋진 작품
영조의 5대손, 흥선대원군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인 예산에 도착해 가야산으로 가는 길엔 창밖으로 예당저수지가 보인다. 우리나라에 있는 단일 저수지 중 가장 커 여의도의 3.7배나 된다. 자동차로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데 2시간 남짓 걸리고, 날씨가 궂어 물결이 높아지면 배를 타고 저수지로 나가는 것이 위험해 바다로 착각될 정도다. 무한천, 신양천 등이 흘러들어 먹이가 풍부하니 물고기 또한 많아 전국 최고의 낚시 명소로 소문난 지 오래, 따끈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이 즐비하다.

슬슬 흥선대원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혈통으로 보면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의 5대손이 되었다.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잡고 있던 때라 왕족이 조금이라도 똑똑한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역모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로 몰아 귀양을 보내거나 죽이던 시대였다. 따라서 가계 상 왕권과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은 천하의 건달 혹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행세해 안동 김씨의 번뜩이는 눈을 피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두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 살에 아버지마저 여읜 이하응의 초년과 중년 시절이 그리 행복한 편은 아니다.

“엄마, 원래 이름이 이하응이랬잖아요. 근데 우리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이렇게 부르는데 이건 무슨 뜻이에요?”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아들이나 친형제 없이 죽었을 때 왕실의 친척 중에서 왕위를 잇게 했는데, 이때 새로운 임금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불렀다.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 아명은 명복[命福])이 왕이 되었으니 이하응은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이 되는 것이다. 조선 역사상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3명이 있지만,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해서 흥선대원군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고 민생을 안정시킴으로써 호응을 얻었으나, 서원 철패와 호포제로 양반들에게 반발을 샀고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다. 또 쇄국정책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 그렇구나. 근데 흥선대원군 아들은 어떻게 왕이 되었어요?”


황제 둘에 욕심을 낸 흥선대원군
자, 이제 믿거나 말거나 풍수지리와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를 해보자. 안동 김 씨의 눈길을 피해 전국을 떠돌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풍수가 ‘정만인’을 만난다. 정만인은 이하응에게 조상을 모시면 후대가 잘될 명당을 일러준다. 추천한 명당은 두 곳이었다. 2대에 걸쳐 황제를 낼 곳(가야산 동쪽)과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곳(광천 오서산)이었는데, 대원군은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즉 두 황제가 날 터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다.

어느 날 가야사에 불이 나고 절을 지키던 승려는 연못에 빠져 죽은 채 발견되었다. 항간에는 가야사를 호시탐탐 노리던 흥선대원군이 가야사 주지스님을 매수해 불을 지르도록 했다 한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최고의 명당이라는 가야사 오층석탑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을 모셨고, 이장을 한 다음 해에 재황을 낳았다. 이 아이가 후일 고종으로 즉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고종 황제가 되었고, 고종의 아들 역시 왕위에 올라 순종 황제가 되었으니 2대에 걸쳐 황제가 난다는 명당이 맞는 듯하다.

바다처럼 드넓은 예당저수지

남연군을 이장하던 남은들상여
“엄마, 그러고 보면 풍수지리라는 것이 맞나 봐요.”

가야산 중턱으로 남연군의 묘를 보러 가며 딸아이가 이야기한다. 오르는 숲길이 고즈넉하고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청아하다. 가는 길에 ‘남은들상여’가 보인다. 남은들상여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을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으로 이장했을 때 사용한 상여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기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다. 상여는 사용 후 남은들에 주고 간 것이라 남은들상여라 부르는데, ‘남은들’은 광천리의 옛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상여는 사용 후 해체하는데, 남은들상여는 조립된 그대로 보기 좋게 전시되었고 음산한 일반 상여막의 분위기와 달리 밝고 환한 자리에 세워져서 아이들과 돌아보기에 좋다.


천하의 명당에 자리한 남연군 묘

자박자박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남연군 묘가 나온다. 이곳이 황제 두 명을 낸다는 천하의 명당으로, 석문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포진한 가사봉과 옥양봉이 좌청룡 우백호가 돼 남연군 묘를 반원으로 감싸 안은 형국이다. 이 묘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묏자리를 잡아주던 풍수가 정만인은 묘를 쓸 당시 도굴이 염려되니 석회석으로 다져놓으라 했다. 1868년 4월 21일 밤 오페르트 도굴단이 묘에 이르렀으나 단단하게 굳은 석회석 때문에 묘의 일부분만 파헤치다 도주했고, 이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쐐기를 박는 결과를 가져왔다. 풍수가는 명당뿐 아니라 먼 미래도 내다볼 줄 아는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궁금하다. 돌아오는 길 조용하던 딸아이가 한마디 던진다.

“엄마, 납골당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같은 자리에 많은 분들이 모셔져 있는데 그럼 그 자손들의 운명은 모두 똑같아요?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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