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배혜정도가 배혜정 대표의 막걸리 인생이 10년을 채웠다.
굳이‘채웠다’고 한 건 그저 세월이 흘러 맞은 10년이 아니라 그녀가 척박한 막걸리 시장을 개척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 대표는 권투로 치면 이제 연습용 잽만 날리다 링에 올라섰을 정도라며 겸손해한다.
아직 본격적인 경기가 남았다는 그녀의 막걸리 사랑이, 인생이, 철학이 궁금하다.

 

 
어느 날 저녁, 아들 친구 엄마가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찾아온 적이 있다. 가끔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은 기울여도 막걸리는 생소했다. 와인을 이긴 막걸리 붐이 한창이어도 뉴스 속의 일이었다. 솔직히 대학 때 잠깐 맛보고 텁텁한 맛에 외면했다. 하지만 그날 그 엄마가 들고 온 막걸리는 왠지 반갑고 이상하리만치 술술 넘어갔다. 막걸리 CEO로 알려진 배혜정(56) 대표를 만나러 가는데 자꾸만 그날 마신 의외의 막걸리가 떠오른다. 기분 좋은 인연을 이어준 막걸리 한 잔을 기대하면서 배혜정도가의 문을 두드렸다.

전업 주부에서 막걸리 CEO가 되다
처음 만난 배혜정 대표는 파마기도, 화장기도 없는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순수한 모습이 막걸리와 닮아 보였다. 그렇지만 눈빛만큼은 전통 술도가를 이끄는 장인의 카리스마로 강하게 빛났다. 함께 간 사진작가를 보고야 “옷이라도 좀 차려입을 걸” 하며 환하게 맞아주었다.

배혜정 대표는 익히 알려진 대로 전통주의 대가 우곡 배상면 선생의 딸이다. 그리고 배 대표의 오빠와 남동생은 각각 우리나라 전통주의 대표 기업 ‘국순당’과 ‘배상면주가’의 대표다. 여기에 배혜정 대표까지 2001년에 정식으로 ‘배혜정누룩도가’를 설립해 전통주 명가의 가업은 삼남매에게 이어졌다.

평생 전통주를 연구해온 아버지를 따라 삼남매 모두 가업을 이어가는 것은 운명이 었으리라. 배 대표를 보면서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주인공 은조가 오버랩 되었다. “우리 집도 한옥이었고 집마당 한가운데 큰 우물이 있었어요. 그 물을 떠다 술을 빚었고요. 술독 가득한 발효실을 놀이터 삼아 숨바꼭질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하지만 배 대표는 주인공 은조처럼 가업을 이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 역시 딸을 예뻐만 했지 가업 이야기는 안 했다. 배 대표는 대학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설 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해외를 돌아다니며 두 아들을 키우는 전업주부로 마흔까지 살아왔다. 전업주부지만 자기계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곳에서 배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하나씩 꼭 배우려고 애썼다.

둘째 아들 낳고 일본에서 살 때도 24시간 일본 교육방송을 켜놓고 일본어를 중얼거리며 독학으로 일본어를 터득해 5년간 인테리어 학교에서 디자인 공부도 했다. 파키스탄으로 발령이 났을 땐 해외 원조 자원봉사단체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을 펼치면서 세상을 익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막걸리 사업을 제안했고, 배 대표는 왠지 모를 숙명 같은 느낌에 이끌려 1999년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당시 제 마음속에 ‘더 이상 누구의 엄마와 아내로 살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있었어요. 새로운 걸 배워도 가슴속 어딘가 비어 있는 기분이었죠. 그러면서 아버지가 늘 강조하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찾고 있을 때, 아버지의 권유는 정말 타이밍이 좋았죠.”

예술은 8년, 장사는 10년,
막걸리는‘아버지’다
배혜정 대표의 막걸리 인생도 어느 덧 10년이 되었다. 그사이 외면 받던 막걸리가 붐을 일으키면서 참살이 식품으로 재조명되고, 명품 막걸리로 고급화되었다. 그 선견지명의 주인공이 바로 배 대표다. 남자들의 세계인 척박한 주류 업계에 이름 석 자 당당히 올린 회사의 대표가 된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잇고 자아실현의 계기로 삼았다고 해도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술 세계에 도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 세계를 몰랐기 때문에 멋모르고 뛰어들었죠. 저도 모르게 보고 자라면서 의식깊이 새겨져 있었나 봐요.” 막걸리 사업 10년을 맞은 감회도 들어보았다.

“아버지가 ‘예술은 8년 장사는 10년’이라고 직접 쓴 족자를 건네며 ‘예술보다 장사가 인내를 더 요구한다. 10년 인내해야 한다’고 격려해주셨죠. 그땐 의미를 몰랐는데 정말 10년이 되니 조금씩 눈에 보이는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0년이 그저 지나온 세월은 아니다. 술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아버지의 50년 넘는 연구 결과물과 노하우를 배워갔다. 하지만 기본만 익혔을 뿐, 배혜정표 막걸리를 만들어야 했다.
“막걸리의 텁텁한 맛이 문제였어요. 발효공정이 미숙해서 잡균이 많기 때문이죠. 세계화하려면 원재료의 깔끔한 맛을 살려야 하는데….”

전통의 복원과 기술 혁신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했다. 그가 만들고 싶은 건 돈을 목적으로 한 막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돈이 목적이었으면 남편과 같이 했을 거예요. 밀가루에 감미료를 넣어서 저렴하게 만들어 팔면 돈은 되지요. 하지만 돈이 목적이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말씀처럼 ‘가치’있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주 막걸리를 프랑스의 와인이 나 일본의 사케처럼 질 좋고 다양한 막걸리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에서 가치있는 삶을 찾으려고 시작했어요. 명품 막걸리를 만들겠다는. 지금 생각하면 무척 용감했구나 싶어요.(웃음)”

그래서 그는 ‘최고의 재료를 쓴다’는 원칙을 세웠다.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던 때 배 대표는 국산 쌀, 그것도 제일비싼 경기미를 선택했다. 플라스틱 병에 담는 것이 상식이던 그 시절에 고급스런 유리병에 담았다. 하지만 팔리지 않았고 돌아오는 건 “부잣집 따님이 취미 생활로 만든 술”이라는 악담이었다고.

집안 배경 또한 불리하게 작용했다. 세상은 배 대표를 그가 세운 작은 막걸리 회사 대신 아버지의 회사 국순당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가 쌀값, 병 값, 직원 월급, 행사 비용 등으로 매달 자금 압박에 시달렸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마케팅 비용이니 뭐니 해서 두 배 세 배 높이 부르기도 했다.

평생 몰랐던 가난을 등짐처럼 지고 휘청 거린 배 대표도 ‘쌀 등급을 낮춰볼까? 경기미 말고 일반미를 써볼까?’ 유혹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그를 다잡게 만든 스승이 아버지다.

“힘들 때마다 아버지는 정말 귀신같이 찾아와 ‘참 잘하고 있다’고 용기를 주셨어요. 아버지는 제게 햇살 받아 따뜻해진 담벼락에 기대고 있는 것 같은 존재죠. 그래서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었어요. 제게 막걸리는 아버지예요. 막걸리 사업을 시작한 것도 모두 저의 스승이자 아버지가 계셨기에 가능했으니까요.”

‘수출이 아니었다면…’
절망 속에서 세계화의 희망을 보다

하지만 주류 시장의 벽은 높디높았다. 배대표는 쌀이나 곡식 외에도 과일즙을 넣어 빛깔 고운 막걸리를 만든다거나 막걸리 선물 세트를 만드는 등 갖가지 아이어디를 냈지만, 사람들은 낯설어했고 시장에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대형 주류 회사에서 냉장고를 지원한 소매점에서 배 대표의 술을 발견하면 그날로 쓰레기 신세가 되었다.

“그때 우리 직원들 하는 일이 팽개쳐진 술을 수거하는 일이었어요. 병이 깨져서 바닥이 더러워졌으면 청소까지 하러 다니고. 막걸리를 만들 줄만 알았지 마케팅을 몰랐죠.”

대기업처럼 대리점 마케팅도 도전해봤지만, 술은 죄다 반품으로 돌아왔다.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급기야 회사를 넘길 위기가 왔다.

하루는 팔을 못 쓰고, 하루는 목을 못 쓰는 등 몸에 마비가 온 것. 병원에서는 스트레스성(심인성) 질환이라고 했다. 안 흘려본 눈물을 마흔이 넘어서 흘렸다. 더 이상 틸 힘을 잃은 배 대표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픈 딸의 모습에 아버지 역시 선선히 허락을 했다. 계약서에 도장 찍을 날을 앞두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자식 같은 회사를 넘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포기한 엄마로 남는 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그날의 인수 건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 일 이후 회사 규모를 줄이고 새 마음으로 열심히 달린 결과 일본과 대만, 미국에 적은 양이지만 꾸준한 수출이 이어졌다. 또 인천국제공항 면세점에 유일하게 한국 막걸리로 입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수출이 없었다면 정말 사업을 접었을지 몰라요. 일본에 수출할 때는 절대 밑지는 수출은 하지 않았어요. 대신 철두철미한 품질을 약속했죠.”

2008년 일본발 막걸리 붐이 일었다. 그리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본 사람 90퍼센트가 막걸리를 알아요. 일본 여자들 60퍼센트가 막걸리를 먹어봤고 요. 노력의 대가가 서서히 나타난 거죠.”

배 대표의 막걸리는 굵직한 정부 행사에 만찬주로도 선보였다. 2009년 최고 히트 상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도 직원들에게 “그동안 우리는 권투로 치면 잽만 열심히 날렸다. 이제 링에 올라갔다. 시합이 남았다. 우승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단다.

부잣집 딸이라는 세상의 편견을 깨고 이뤄온 배혜정 대표의 막걸리 인생 10년.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가 추구하는 우리 전통주 막걸리도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강한 술이 되길 기대한다. 그날 밤, 리포터는 배 대표가 싸준 ‘새색시’를 한 잔 기분 좋게 마셨다. 포도즙을 넣어 연보랏빛 어여쁜 술이다.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갈팡질팡하는 리포터의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미즈내일 이은아 리포터 identity9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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