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과 햇살이 좋다. 돌담길은 끝없이 이어지며 미로처럼 이리저리 구부러진다.
문득 펼쳐진 공터엔 커다란 은행나무 가지 끝에서 300년 전의 이야기가 뚝뚝 떨어진다.
돌담길 끝자락엔 돌돌돌 개울이 흐르고, 비밀스런 이야기도 흐른다.

 
산들산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 여행하기 딱 좋은 때다. 아이들과 숙제를 하다가 그 끝을 물고 전남 강진으로 향한다.

숙제는 ‘17세기 조선의 존재를 유럽에 알린 책에 대해 조사하기’다. 대표적인 책으로 〈하멜 표류기〉를 택했다. 아이들과 자료를 조사하다 강진군하멜캡슐시스템(www.hamel.go.kr)에 접속했는데, 그곳 어린이하멜관에는 ‘동화로 보는 하멜 표류기—하멜 아저씨가 어떻게 우리나라에 왔을까?’ 등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배경은 전남 강진, 놀토를 맞아 아예 현장으로 가서 하멜 아저씨의 흔적과 동선을 살펴보기로 했다. 강진까지 가는 다소 지루한 시간, 조용하던 아들이 뜬금없이 질문을 한다.

“엄마, 하멜 아저씨가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나는 네덜란드가 궁금한데, 네덜란드 사람들도 우리가 궁금했을까요?”

옹성이 12개나 되었던 병영성.
네덜란드 사람이 여기 와서 돌담을 쌓았다고?
한반도의 남쪽 끝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전라남도 강진 땅이 있다. 흙이 차져서 이 흙으로 비취빛이 도는 청자를 빚고, 거기에 모양을 내어 붉고 검은 흙을 넣어 구우면 푸르고 흰 빛이 도는 상감청자가 탄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진을 도자 체험 여행지로 방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목적이 다르니 강진 병영마을로 향했고, 시간이 나면 도자 체험을 하기로 했다. 강진 병영마을, 이름에서 군대 냄새가 난다. 맞다. 병영마을은 병영성이 있는 마을이고, 병영성(사적 397호)은 둘레 850미터(2천800척)에 높이 5.5미터(18척), 옹성이 12개인 제법 큰 성이다. 조선 왕조 500년간 군사거점 역할을 하며 제주도를 포함해 53주 6진을 총괄했다. 당시에는 세(勢)가 커서 병영성 주위에 3천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10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는 말이다.

고즈넉한 마을로 접어드니 돌담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돌담의 모양이 특이하다. 납작한 돌을 골라 15도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흙으로 고정한 뒤, 다음 층은 반대 방향으로 15도 정도 눕혀 쌓았다. 커다란 돌이 듬성듬성 박힌 우리네 돌담과 조금 다르다. 주의 깊게 돌담을 보고 있으니 이 마을 아저씨가 한마디 하면서 지나간다. 네덜란드 식 돌담이란다.

“네덜란드 식 돌담? 그럼 하멜 아저씨가 쌓은 거예요? 그 옛날에?”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멜 식 돌담’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잔뜩 인상을 쓰며 무언가 생각하던 딸아이가 “아하~ 네덜란드는 땅이 바다보다 낮대요. 그래서 둑을 잘 쌓는다고 했어요”라고 말한다.

 

병영성 홍교 바로 옆 매화마름 저수지.

한 많고 사연 많은 하멜과 그 일행
아들이 뒤늦게 질문 공세에 나섰다.

“아빠, 하멜이 네덜란드 사람이잖아요. 치즈도 갖고 왔을까요? 돌담은 왜 쌓았대요?”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아이들을 앉히고 몇백 년 전 이야기를 동화처럼 들려준다.

다산초당
지금부터 358년 전인 1653년, 암스테르담을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스페르베르 호는 거센 폭풍을 만나 제주도 서쪽 해안에 표류한다. 함포를 포함한 각종 병기와 향신료, 설탕, 명반, 동물 가죽 등 11톤(30만 냥)에 이르는 무역품이 실려 있던 배는 산산조각이 났고, 선원 64명 중 36명이 살아남았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헨드리크 하멜(1630~1692)이다. 제주에서 1차 탈출 실패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3년간 생활하다 2차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이곳 전라병영에 억류되었다. 이들은 죄인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1656년, 하멜 일행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어땠을까?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래서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생김에 아이들과 여자들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도망쳤고, 남자들은 돌아서 다녔다 한다. 죄인이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부역과 노동으로 돌담을 쌓았고, 겨울에는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수인산에 올라 땔감을 마련했으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앉아 있는 800살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85호)는 하멜 일행이 고단한 일을 하다 잠시 쉬던 장소다. 멀리 수인산성을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방인이 고향을 그리는 외로움에 생활의 고단함까지 더했을 생각을 하니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졌다.

땀 들이던 은행나무, 천렵하던 적벽청류
아이들과 은행나무를 한 번 더 보고 돌담을 따라가니 제법 큰 개울이 나온다. 이곳에는 ‘적벽청류’라 새겨진 바위벽이 있는데, 하멜 일행이 그 아래서 천렵을 즐겼다고 한다.

“엄마, 하멜도 한복 입고 여기 개울가에서 물고기 잡으며 놀았어요?”

반 한국인이 된 이들이 개울가에 솥을 걸고 한복 바지를 걷어 올리고 우리네처럼 천렵을 즐기는 광경을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아치형과 용두가 어우러지는 병영성 홍교.
하멜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의 인원은 33명, 여수로 떠날 당시 22명이 생존했으니 11명은 이곳 병영 땅에 뼈를 묻었다. 이후 전라좌수영과 순천, 남원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7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발표하니 조선 생활 13년 20일 만의 일이다.

문득 아이의 질문이 다시 생각난다.

“엄마, 네덜란드 사람들도 우리가 궁금했을까요?” 〈하멜 표류기〉는 당시 유럽 사회를 뒤흔들었으니, 신비한 동양 이야기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결국 유럽 사람들도, 네덜란드 사람들도 우리를 무척 궁금해 했다는 얘기다.

입에 착착 붙는 남도 음식 한 상
하멜의 흔적을 돌아보는 강진 병영마을은 한없이 예쁘다. 하멜 일행의 땀방울이 맺힌 돌담 발치에는 빨간 가슴 드러내며 봉숭아가 한들거리고, 무지개 모양 다리에 용머리를 단 병영성 홍교와 매화마름 가득한 저수지를 구경하노라니 유난히 코가 큰 벅수(장승)가 눈에 띄어 그것에도 하멜의 의미를 부여한다. 어느덧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한 상 가득 푸짐한 남도 음식을 앞에 놓고 먹을 것이 없어 고생했다는 하멜을 생각하니 미안하지만,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은 어찌할 수가 없다. 상에 올라온 남도 김치와 젓갈, 무순, 청국장, 호박나물을 보며 이러한 음식을 처음 입에 넣었을 때 하멜의 표정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13년 만에 돌아간 네덜란드에서 구수한 육자배기 한 자락과 오묘한 남도의 맛을 기억하고 그리워했을까도 자못 궁금해진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들놈이 갑자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단다. 반가운 마음에 왜냐고 물었더니 “하멜 아저씨가 살던 네덜란드는 풍차가 엄청 많잖아요. 그 풍차 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그렇게 큰 게 정말 돌아가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야 밥도 사 먹고, 풍차 있는 데도 찾아가고….”

결론이 그렇게 되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들어선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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