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3대 여류 시인 하면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을 꼽는다.
그중 두 명이 강릉에서 태어났으니, 강릉 땅은 여류 작가의 산실과도 같은 곳이다.
푸른 수평선에 눈이 베일 듯한 바닷가와 소나무가 어우러지는 강릉으로 문학 여행을 떠나자.

 

고즈넉한 허난설헌 생가의 오후.

대관령이 높긴 높은가 보다. 강릉 시내가 구름 아래로 보이니 말이다. 나무꾼과 소금 장수들이 굽이굽이 넘던 대관령, 이제는 자동차로 넘으니 조금 싱겁기는 하지만 말도 붙일 겸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얘들아, 지금은 자동차로 휙~ 넘지만 옛날에는 걸어서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었대. 호랑이가 나타날까 무서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넘기도 했지. 높은 산이라 굽이가 많았는데 몇 굽이나 되었을까?”
“20굽이, 30굽이요! 아니야, 50굽이는 될 거야.”

초당두부의 뜨끈함과 어우러지는
동해의 청아함
길이 험해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을 한자어로 적으면서 생겼다는 대관령(大關嶺)을 강릉에 사는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면서 곶감 한 접(100개)을 지고 올랐다 한다. 힘이 들어 한 굽이 돌 때마다 하나씩 빼 먹으며 정상에 도달하니 곶감 하나만 남아 대관령은 아흔아홉 굽이로 전해진다는 얘기를 들려주니, 아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강릉 시내를 지나 경포대 근처에 이르니 시원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그곳 솔밭 어디쯤에 내가 찾는 여인이 있을 것이다. 대관령 굽이보다 굴곡진 삶으로 알려진 ‘조선의 여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다. 그의 이름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삶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를 찾아가는 길엔 펄펄 김이 나는 초당두부가 허기진 식객의 발길을 잡는다.

허난설헌은 행복한 여자였다. 명종 18년(1563) 대사헌을 지낸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딸로 태어났으며,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이 그의 동생이다. 아버지 허엽이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 동헌 뜰에서 나는 물로 두부를 만들게 했는데, 이것이 초당두부다. 두부의 이름은 허엽의 호 ‘초당’에서 유래한다.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다.

 

5문장 시비들이 볼 만하다.
대관령 굽이 같은 허난설헌의 삶
여자들은 글공부를 시키지 않던 봉건적인 시대에도 난설헌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남동생, 오빠와 함께 글공부를 했다. 허난설헌은 문장이 뛰어나 아버지 허엽, 큰오빠 허성, 작은오빠 허봉, 남동생 허균과 더불어 ‘허씨 5문장’이라 불렸다.

“엄마, 그때 여자들은 왜 공부를 못 했어요? 돈이 없었어요?”

아이들이 묻는다. 가난한 사람이야 당연히 돈이 없어 공부를 못했지만, 당시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처럼 교육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바깥출입도 어려웠다는 말에 아이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다. 생가 뜰에 핀 꽃과 뒷마루, 부엌을 돌아보는 딸아이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내 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과 혼인을 했다. 5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문벌 집안으로 허난설헌보다 한 살 많았고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여덟 살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을 지어 신동 소리를 듣던 난설헌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봉건적인 집안에서 자란 김성립은 자신보다 잘난 아내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밖으로 돌았으며, 현모양처를 바라는 시어머니는 글을 짓는 며느리를 탐탁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시집살이였고 불행한 나날이었다. 아버지 허엽은 경상감사를 하던 중 병에 걸려 상주에서 객사했고(난설헌 18세), 동생 허균은 귀양을 갔으며(난설헌 21세), 오빠 허봉은 황달과 폐병으로 38세에 객사했다(난설헌 26세). 난설헌에게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는데 돌림병으로 죽고, 그 충격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고 만다. 몰락해가는 집안과 자식을 잃은 아픔, 속 좁은 남편,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 등 난설헌은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였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생각이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한다.

 

불타버린 16세기 여류 시인의 작품들
어느 날 난설헌은 시를 하나 지었는데, 불행히도 이 시는 그녀의 절명시가 된다.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닷물은 옥 같은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파란 난새가 아롱진 난새와 어울렸네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달빛은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구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하니, 오늘 부용화가 서리를 맞아 붉어지겠다”며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을 감으니 난설헌은 향년 27세를 일기로 요절했다(1589년 3월 19일). 부용삼구타(3×9=27)! 난설헌이 세상을 살다 간 시간이다. 그녀가 쓴 시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였는데, 다비(茶毗 : 시체를 화장하는 일)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녀의 시가 대부분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무척 잘 쓴 시라는데 다 태웠다니 아까워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능소화가 핀 담장이 허난설헌처럼 고운 자태를 뽐낸다.
허균은 누이의 시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자신이 암송하던 시와 본가에 남아 있는 시를 모아두었다. 허난설헌이 세상을 뜨고 17년이 지난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허균이 보여준 그녀의 유고에 감탄하다가 명나라에 가져가 <난설헌집(蘭雪軒集)>을 발간했다. 시집의 주문이 쇄도해 낙양의 종이 값이 올랐을 정도였다니 한류 열풍의 원조라 할 만하다. <난설헌집>은 명나라에서 조선에 역수입되었지만, 허균이 반역죄로 처형되자 시집도 매장되었다(1618년). 1692년에야 부산 동래에서 조그맣게 간행되었고, 일본의 사신들이 가져가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 간행되었다(1711년).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으로 국제적인 각광을 받은 허난설헌의 시가 213수만 남고 불타버린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고사리같이 여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허난설헌 생가를 돌아보자니 허난설헌이 남긴 말이 생각난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첫째 한이요, 여자로 태어난 것이 둘째 한이며,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 셋째 한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대에 사는 나와 내 딸이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문밖출입은 물론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고, 교육 받을 수 있으며, 글을 쓸 수 있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남의 불행에 견주어 나의 행복을 찾는 건 옳은 일이 아니지만, 21세기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허난설헌이 부러워할 삶이라는 것이 이번 강릉 여행에서 얻는 슬픈 교훈이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Travel Note
강릉의 대표 명소

 
경포호&경포대
강릉 시내 북쪽에 있는 호수로,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고 소나무 숲이 좋다. 경포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경포대(鏡浦臺)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다.

 
오죽헌(烏竹軒)
신사임당과 그 아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뒤뜰에는 이름의 유래가 된 검은 대나무[烏竹]가 많다.
문의 033-640-4457

 
참소리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
세계에서 한 대밖에 없다는 축음기를 비롯해 소리, 빛, 영상과 관련된 진귀한 기계·장비 6천500여 점과 음반 10만 점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오디오 박물관이다.
문의 033-655-1130(www.edis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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