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포니정 홀에서 잡힌 인터뷰 약속이 당일 오전에 갑자기 변경되었다.
내부 수리 관계로 인터뷰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서희태 지휘자의 자택으로 오라는 기별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집에서 만나면 외부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한 대화가 가능한데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공간 아닌가. 예감은 적중했다.
서래마을의 한 빌라에 들어서는 순간 아우라가 느껴지는 훤칠한 남자와 그 배경에 감탄사를 멈출 수 없었다.

 

 

 

아내의 손길,
아내의 지휘가 만든 남자
“화이트 셔츠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인데요.”

동행한 사진작가가 감탄을 한다. 막 옷을 갈아입으려던 서희태(47) 지휘자를 만류하며 카메라에 담는 동안 집 안을 둘러봤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층층에 화분과 장식, 그림들이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듯 놓였고, 벽에는 가족의 역사를 말해주는 사진이 빼곡하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컬렉션, 오래된 소품들이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다. ‘사랑스럽고 단정하며 이야기가 있는 집’이라고 제목을 붙여주고 싶다. 세련된 인테리어 전문가의 안목이나 그저 쓸고 닦는 가사도우미의 노력만으로 될 수 없는, 집 안을 오래 가꾸고 사랑하는 주부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더구나 이 집의 안주인은 화려하고 도회적인 소프라노 고진영씨니 세상엔 어쩌면 이리도 완벽한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내는 공연이 없는 날은 거의 집에서 지내요. 외출하기보다 집에서 만들고 꾸미는 걸 좋아해요. 결혼한 지 스무 해가 넘었지만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거나 소리 지르는 걸 한 번도 못 봤어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내 칭찬에 침이 마르는 ‘의외의 팔불출(?)’이다. <베토벤 바이러스> ‘강마에’의 롤모델이 맞나 싶다. 그러나 이내 인정해야 했다. 그를 빛나게 하는 원천에는 이토록 편안하고 부드러운 아내의 손길과 눈길이 감싸고 있음을….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악기를 배우고 음악을 사랑했건만, 정작 아버지는 음대 진학을 반대하셨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덜컥 음대에 합격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꿈을 홀로 책임져야 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학습지 교사부터 성악 레슨, 막노동, 지게꾼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다. 어느 날 우연히 교내 오케스트라 연주 장면을 보던 그를 홀린 듯 우두커니 서 있게 한 것은 베토벤 교향곡 9번 1악장이다. 그 순간 우주의 소리를 들었고, 영혼 깊숙이 들어오는 전율을 경험했다. 베토벤을 만나고픈 열정으로 결국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고, 만난 지 일주일 만에 프러포즈했다. 당시 그들의 나이가 스물네 살, 스물세 살. 어려운 형편에 유학 보내놓은 자식들이 결혼하겠다니 양가 부모의 반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기할 이들이 아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 어설픈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가난한 유학 생활로 돌아갔다.

“유학 생활의 어려움을 통해 많이 성숙했지요. 월세도 못 내고 열흘 내내 한 봉지에 500원 하는 양배추 음식으로 버텨야 했지만, 가족이 있기에 견딜 수 있었어요. 의기소침한 남편에게 아내는 한결같이 용기를 주었죠. ‘당신이 제일 잘해, 당신이 어려우면 남들도 어려워, 당신은 잘할 수 있어’하며 내 속의 능력을 끄집어내 준 사람이 아내예요.”

베토벤 교향곡이 영혼을 울리던 순간부터 모든 것은 예정되었는지 모른다. 가난해도 꿈을 향해 달렸고, 음악과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으니 말이다. 게다가 2008년 방영된 <베토벤바이러스>까지. 음악에 대한 꿈으로 모인 평범한 사람들이 이루는 열정적인 오케스트라 속의 애환과 사랑. 지휘자 ‘강마에’(김명민)의 독설과 카리스마는 단연 세간의 화제였고, 드라마 예술감독을 맡은 그가 롤모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 성격도 그렇게 까칠할까. 그가 웃는다.

 

예술 교육이 사라진 공교육 현장,
안타까울 뿐
큰아들 현호는 플루트를 전공하는 대학생이고, 딸 안나는 미술 디자인을 공부하는 고3이다.

“사실 딸도 음악 하기를 바랐는데 단번에 거절하더군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노래만 들었다며 음악은 지겨우니 미술을 하고 싶다기에 오케이 했지요.”

그의 교육철학이다. 첫째 강요하지 않고, 둘째 기회를 주며, 셋째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

“아이들에겐 알려진 부모의 이름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죠. 학교 선생님까지 서울대나 한예종에 가야 한다고 강요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나 싶어요. 한번은 과외 선생을 모셔왔는데 첫마디가 꿈이 뭐냐고 물어요. 아이가 음악가가 되고 싶다니까 ‘그러면 서울대 음대 가야지’하더군요. 다음 날 오시지 말라고 했어요.”(이 부분에서 리포터는 박수를 보냈다.)

정서의 완성기라 할 고등학생 시절, 2학년 때부터 음악과 미술 과목이 없는 것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그는 두 아이가 음악 덕에 사춘기를 큰 방황 없이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음악에 활발하게 참여한 아이들이 커서 미국의 주류 사회를 구성한다’는 오하이오주립대의 연구 결과에 대해 그는 음악적 성향이 있는 정치인 빌 클린턴(색소포니스트), 리처드 닉슨(피아니스트), 곤잘레스 라이스 국무장관(피아니스트)을 예로 든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텔아비브 의과대학 산부인과 드로르 만델 박사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미성숙아, 조산아를 임신한 산모에게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정상아로 분만하는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 이처럼 음악은 정서를 완성하고 IQ는 물론 EQ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에 감성 교육이며 인성 교육임을 강조한다. 그는 공교육에서 예술 교육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클래식, 제목을 알려 하지 말라
<베토벤바이러스>를 통해 그는 클래식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어렵고 지루하며 특별한 계층만 즐기는 음악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클래식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장르라고 말한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베토벤이 살던 클래식 시대(1750~1820)에는 물론 귀족과 황실을 위한 음악이 존재했지만,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같은 곡은 대중을 위한 음악이었어요. 대중이 끊임없이 원했기에 앙코르 공연이 250년 동안 이어졌죠. 클래식이 어려운 건 당연합니다. 우선 외국어고 제목이 긴데다, 번호가 많기 때문이에요. 굳이 음악을 들으며 작곡가, 제목 같은 정답만 알려고 하지 마세요. 자신의 느낌이 정답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밭에 따라 어느 날은 슬프고, 어느 날은 기쁜 것이 음악의 본질이에요. 그 내용을 아는 순간 틀에 갇히고 창의력은 상실되거든요. 제가 라디오의 한 코너를 진행할 당시 ‘작품 이름은 알려드리지 않을 테니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충실해보십시오’라고 한 이유입니다.”

그는 클래식은 지식이 아니라 느끼는 객체임을 강조했다. 클래식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크로스오버 연주나 클래식과 댄스 등 다양한 시도로 클래식의 대중화에 다가서고 있다.

지난 4월 전 세계에 울려 퍼진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곡 ‘오마주 투 코리아’는 그가 ‘아리랑’을 새롭게 편곡한 곡이다. ‘한’을 품은 ‘아리랑’을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코드로 만들어 국내 팬은 물론 세계인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영화 <매트리스>의 음악감독 로버트 베넷이 편집 작업에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러기까지는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베넷을 설득하기 위해 그의 작업실을 청소하겠다고 말했어요.”

주변에서 그를 가리켜 ‘사하라사막에서도 콜라 들고 나올 사람’이라고 한다는 그의 도전 정신을 알 것 같다. 그는 세계인이 공감하는 화성을 만들기 위해 베넷에게 6개월간 공들였다고 한다. 한국 음악의 세계화는 ‘세계인의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념 때문이다.

“언어에 세계 공용어가 있듯이 음악에도 공용어가 있어요. 바로 오케스트라죠. 오케스트라는 어느 나라에 가도 찾을 수 있어요. 오케스트라를 우리 악기로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음악을 세계화하는 방법이에요. 우리나라의 여러 악기를 오케스트라로 구성하고, 세계인이 읽을 수 있는 악보를 만들면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인 없이 우리나라 악기를 연주할 수 있지요. 세계 페스티벌에서 우리 음악이 연주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예술로 기업도, 가정도 지휘한다
지휘자의 악기는 ‘오케스트라 단원’. 그러므로 지휘자의 가장 큰 임무는 오케스트라 내의 소통이다.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좋은 리더가 필요하며, 좋은 리더는 연주자와 단원들을 배려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지휘자 리더십’은 기업의 CEO들에게 ‘오케스트라 경영’에 눈뜨게 했다. 비단 기업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자녀들을 창의적이고 유연한 인재로 키우기 위해서는 가정의 CEO인 주부들이 아이들의 감성을 어루만지고 행복해지도록 도와주는 지휘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휘자, 연주자, 교수, 공연 연출자, 강사,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넘나드는 그는 어떤 리더일까.

“주변에서는 대단히 머리도 좋고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은 줄 알지만, 사실은 돌아서면 잊어버릴 만큼 평범한 사람이에요. 다만 그것을 커버할 만큼 준비하고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할 뿐이죠.”

그의 고백은 겸손만은 아닌 듯했다. 일등이 되는 일에 매력을 느끼기보다 행복한 하루가 소중하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가족 자선 음악회를 열어 자폐아나 백혈병 환우, 특수 장애아들을 공연장으로 초대한 지 7년째다. 그 아이들에게 공연장의 화려한 불빛과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여주며 아이들의 미래를 기대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것은 음악인으서 사회적 책무라기보다 자연인 서희태에 가까워 보였다. ‘서 마에스트로’의 진정한 카리스마가 조용히 숨어 있었다.


미즈내일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마에스트로 서희태는
1965년 부산 출생. 현재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2008년에 클래식 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의 예술감독을 하면서 ‘강마에’의 실제 모델로 알려졌고, 2009년에는 김연아 선수의 아이스쇼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지휘해 주목받았다. 특히 올해 김연아 선수의 ‘오마주 투 코리아’의 편곡에 참여해 ‘아리랑’을 국악과 클래식으로 접목,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

클래식과 경영을 접목한 경영서 <클래식 경영 콘서트>를 냈으며, 최근 tvN의 <오페라스타>2011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아 오페라를 즐기는 법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쉽게 전달, 눈길을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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