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과 옥빛 바다, 탁 트인 오름과 아기자기한 밭, 정겨운 돌담과 따스한 바람…
제주 올레, 그 위에 서고 싶었다. 늘 관광지 위주로 다녀서 놓친 제주의 참 멋을 올레가 채워줄 것 같았다.
첫 올레 여행인 만큼 여섯 살 아들과 함께 걷기 좋은 6코스를 택했다.
난도는 ‘하’지만 바다도, 오름도, 숲길도 있어 만족도는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올레 6코스
쇠소깍 - 외돌개 올레
난도 : 하, 총14.4km, 4~5시간
쇠소깍→제지기오름 2.6km→보목포구 3.2km→보목하수처리장 5.4km→제주올레사무국 7.9km→정방폭포8.3km→이중섭 거주지 9.5km→서귀포항 10.1km→천지연 기정길 10.5km→외돌개 14.4km

 

오랜만에 제주행을 준비하면서 제주도가 한층 가까워졌다는 데 놀랐다. 저가 항공사의 등장함에 따라 비행기 운항 수가 많아진데다, 운 좋으면 1만 원대 항공권으로 기차 여행보다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다. 소셜커머스에는 호텔과 펜션, 자동차 렌탈, 관광지 티켓 등을 반값에 이용할 수 있는 쿠폰도 속속 등장했다. 그래서인가 최근 제주도에 다녀온 지인들이 부쩍 많아졌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좀더 알뜰히 제주 여행을 할까 머리를 맞댔다. 아무래도 성수기가 가까워지는 시기라 1만 원대 항공권은 없었고 3만~5만 원대로 구할 수 있었다. 때마침 한 소셜커머스에 나온 제주도 할인 이용권도 우리가 계획한 휴가 날짜와 딱 맞았다. 유람선이나 승마, 박물관 등을 반값에 이용할 수 있는 것. 역시 여기저기 손품 판 만큼 제주 여행도 알뜰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주의 길 ‘올레’
이번 여행의 목적은 ‘우리 가족의 첫 올레 도전’에 있다. 꼭 완주하겠다는 무리한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올레 자체가 주변의 풍광을 즐기면서 느긋하게 ‘간세다리’(게으름뱅이의 제주어)처럼 걷는 길이다. 제주어로 ‘놀멍 쉬멍’(놀면서 쉬면서) 걸으면 되고, 걷고 싶은 만큼만 걸으면 된다.

올레는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정해진 코스만 보고 훌쩍 떠나는 관광이 아닌 아름다운 땅 제주의 속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그래서 끊어진 길을 잇고, 잊힌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어 제주 올레가 되었다. 2011년 6월 현재 1코스에서 18-1코스까지 개통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6코스를 선택했다. 6코스는 쇠소깍을 출발해 서귀포 시내를 통과하고 이중섭거리와 천지연폭포 위 산책로를 거쳐 외돌개까지 이어지는 해안·도심 올레다.

 

쇠소깍
6코스 첫 출발지 쇠소깍
바닷물과 민물이 만난
절경에서 노닐다
전날 비가 한 차례 내린 터라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름 낀 날씨였다. 다행히 햇빛 쨍쨍한 날보다는 걷기 좋았다. 운동화를 신고 바람막이 점퍼와 우산, 여동생이 정성스레 싸준 김밥 도시락에 물까지 챙겨 들고 차를 이용해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건너왔다. 일단 6코스 마지막 지점인 외돌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 6번 코스의 시작점인 쇠소깍으로 이동했다. 

쇠소깍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면서 절경을 빚어낸 관광 명소다. ‘쇠’는 소, ‘소’는 웅덩이, ‘깍’은 끝이라는 제주어로 ‘벼랑 끝에 있는 못’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쪽에는 호수처럼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고, 맞은편 바다는 쉴 새 없이 파도 치는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면서 신비로웠다. 쇠소깍에서는 통나무를 엮어 만든 전통 어선 ‘테우’를 타볼 수 있는데, 우리가 간 날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시작부터 우리는 느릿느릿한 ‘간세다리’였다.

 

제지기오름(2.6km) 
섶섬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오름
바다가 내려다보이도록 잘 다듬어놓은 올레를 따라 쇠소깍에서 소금막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주 올레는 안내 표식을 따라 걷는 재미가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파란색과 주황색 리본은 갈 길을 안내해주고, 길바닥이나 돌담, 전신주에는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파란색 화살표가 있다. 갈림길에는 파란색 ‘간세’가 앙증맞게 서 있다. 간세는 제주 올레의 상징인 조랑말의 이름. 간세의 머리가 향한 방향이 길의 진행 방향이다. 간세의 몸통에는 위치 번호가 있어 올레지기나 콜택시를 부를 때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설명하기 쉽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어느새 제지기오름에 다다랐다. 제지기오름은 섶섬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오름으로, 옛날 이 오름에 절지기가 살았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 한가로이 자리한 섶섬은 각종 희귀 식물과 기암괴석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 무인도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다 풍경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제주 해녀가 물질할 때 쓰는 주홍색 태왁(해산물을 담는 주머니인 망사리에 달린 뒤웅박)이다. 해녀들이 대부분 할머니라고 하니 “할머니들이 수영을 잘해요? 상어가 나타나도 안 무섭대요?”하며 아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해녀 할머니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목포구(3.2km)
섬순이네 가게서 미역귀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슬슬 배꼽시계가 신호를 보낼 때, 마침 ‘섬순이네 가게’를 지나치게 되었다. 장작불에서 뭔가 열심히 굽는 제주 아지망(아주머니의 제주 방언)을 만났다. 호기심에 뭔가 하고 보려니 “미역귀 먹고 갑써(?)” 하며 말을 건넨다. 전날 비바람 불고 파도가 세게 치면서 미역귀가 해변까지 밀려왔다는 것. 미역귀는 미역의 머리 부분이다.

제주 아지망은 미역귀가 밀려오는 날이면 어린 시절 미역귀를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워 먹었다고 한다. 여섯 살 아들을 보더니 평생 기억에 남는 미역귀 따기 체험이나 하고 가라며 아예 그릇과 과도까지 내준다. 우리 가족은 엉겁결에 받아들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곳엔 정말 파도에 밀려온 미역귀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미역귀도 따고 게도 잡고, 순식간에 어촌 체험장에 온 기분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다 구워진 미역귀를 안주 삼아 한 잔에 1천 원 하는 제주도 생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곤 양해를 구하고 김밥 도시락도 꺼내놓고 점심까지 해결했다. 우리가 진을 치고 있으니 젊은 총각 올레꾼도 지나가다 인사를 건넨다. 총각이 주문한 고추전에 어묵탕까지 대접받으며 갈 길을 잠시 잊고 아름다운 제주 이야기에 푹 빠졌다. 올레는 길 따라 산과 바다만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이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정방폭포(8.3km)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 폭포 

정방폭포
섬순이네에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나 보다. 속력을 좀 내볼까 했더니 혼자서 겨우 지나갈 정도의 스릴 만점 숲길이 펼쳐졌다. 축축한 진흙길에 신발이 더러워져도 희귀한 꽃과 풀, 새소리에 기분은 절로 상쾌해졌다. 무엇보다 아들이 숲길을 무척 재밌어했다. 5km 가까이 걸었는데도 다리 아프다, 업어달라 하지도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구두미포구, 보목하수처리장을 지나 제주올레사무국까지 쉼 없이 걸었다. 이제 슬슬 발바닥이 아프고 종아리가 당겼다.

마침 제주올레사무국에 도착해 패스포트를 구입해 스탬프도 찍고, 기념품도 몇 가지 구입하며 쉬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고 시간은 촉박했다. 일어나 다시 정방폭포로 향했다.

정방폭포는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 폭포다.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와 더불어 제주도 3대 폭포 중의 하나기도 하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힘찬 기운에 잠시 땀을 식혔다.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가 8km가 넘다니.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진해졌다. 한 번 풀린 다리는 좀처럼 다시 내딛기 힘들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이중섭미술관 관람 시간이 오후 6시까지라 빠듯했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에 빠진 우리는 올레 체험은 정방폭포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중섭미술관에 가기 위해 재빨리 택시를 탔다.

 

이중섭미술관(9.5km)
이중섭과 아내의 애절한 편지를
엿보다
이중섭미술관으로 가는 오르막길 표지판과 보도블록이 이중섭 화가의 작품들로 꾸며져 운치를 더했다. 그가 잠시 살던 초가집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가족이 제주도로 피란와 1년 동안 세 들어 살던 초가다. 미술관은 진품 11점을 보유 중이다. 그림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이중섭과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와 주고받은 애절한 엽서에 더 시선이 갔다. 이중섭이 얼마나 가족을 사랑했는지 편지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나오니 드디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홀로 외롭게 선 큰 바위에서
다음을 기약하다!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큰 바위 '외돌개'
우리는 6코스의 종착지이자 우리 차가 주차된 외돌개로 향했다. 울창한 솔숲을 지나니 바다 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큰 바위 외돌개가 나왔다. 약 15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섬의 모습을 바꿔놓을 때 생성되었다고 한다. 홀로 비를 맞고 서 있어 더 외로워 보이는 외돌개와 빗물에 더 푸르러진 소나무, 소나무보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 빛. 아름다운 경치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이 센스 있게 한마디 한다. “다음엔 외돌개에서 시작하는 올레 7코스가 어떨까?”. 비록 완주는 못 했지만 간세다리처럼 놀멍 쉬멍 다닌 올레 6코스의 추억은 느린 만큼 가득 차 있었다.

 

 

 


미즈내일 이은아 리포터 identity94@naver.com
  참고 도서 <제주올레 가이드북>


제주 올레 에티켓
1 내가 먹고 쓰다 남긴 쓰레기는 꼭 챙겨 가기
2 귤 껍질도 길가에 버리지 않기
3 길 옆에 매달린 귤이 탐스럽다고 욕심내지 않기
4 길가에 핀 꽃, 나뭇가지를 꺾지 않기
5 탁 트인 오름 정상에 올라 소리치지 않기
6 뒤에 오는 올레꾼을 위해 리본을 떼 가지 말기
7 코스를 벗어난 가파른 계곡이나 절벽 등으로 모험은 피하기
8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변을 지날 때에는 길가로 다니기
9 사유지 농장을 드나들 땐 내 집 대문인 양 문단속하기
10 길에서 마주친 가축이나 야생동물을 괴롭히지 말기

올레, 이것만은 꼭 챙기자!
1 변덕스런 제주 날씨에 꼭 필요한 비옷과 바람막이 점퍼
2 자외선 차단제, 모자, 선글라스
3 물, 간식, 건건지, 티슈,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약, 밴드, 현금 등 하지만 최소한 짐은 간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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