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리워지면 책을 꺼내보면 될 것이 아닌가. 어머니의 따뜻한 숨결이 깃든 문장을 느끼기 위해 다시 들쳐보리라. 그 빛나는 표현 속에서 더욱 살아 있는 어머니를 느낄 수 있으리라. 겨울 어느 날 어머니가 홀연히 가신 날처럼 눈발이 날리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지만.’

박완서 문학 앨범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첫머리에 실린 수필가 호원숙(58)씨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20년 전 ‘어머니 곁에서 느꼈던 어머니의 냄새, 어머니 곁을 스치던 바람소리를 쓰고 싶어’ 친정엄마의 연대기를 쓴 그가 올해 1월 담낭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글에 담은 것. 작가와 공인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느낄 수 있어 한 구절, 한 문장이 절절히 다가온다.

모녀의 특별한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고 박완서 작가의 집. 비 온 뒤 얼굴을 내민 초여름 건강한 햇살과 집 앞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가 어울려 근사한 하모니를 선물로 내민다. 

 

아름다운 모녀의 시간
박완서 작가가 데뷔작 <나목>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호원숙씨의 나이는 열여덟 살. 어머니의 첫 작품을 읽은 뒤 ‘혁명 다음 날’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엄마가 자신만의 세계로 날아가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는 얘기다.

“40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글을 쓰신 건 아니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집중력을 잃지 않으셨어요. 끊임없는 노력과 노동으로 정직하게 사셨고, 어느 사람보다 당당하셨죠. 고독한 창작의 길을 걷는 어머니를 보면서 연민을 느낀 적도 있어요.”

작가 엄마를 둔 딸의 일상은 남들과 조금 달랐을 게 분명한데. 어머니 품을 대중에게 내준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존경한다’

는 한 마디로 속마음을 나타낸다. 문인으로서 감당할 몫과 한 가정의 며느리이자 아내, 엄마의 역할에 균형을 이루면서 어느 하나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존경의 대상이자 닮고 싶은 롤모델이라는 것.

“돌아가시기까지 생활의 우선순위는 어머니였어요. 지방 강연이 있으면 운전해 모시고 가고, 만두나 빈대떡처럼 좋아하는 음식도 만들어드리고요. 좀더 많이 보살펴드릴 걸 후회도 되지만, 함께 한 시간을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기억할래요.”

박완서 작가의 석 달여 투병 기간이 가족에게는 더없이 소중했을 터. 국을 떠먹여드리고 발을 주물러드리던 때가 그립지만, 동시에 그런 시간이 주어진 게 감사하다는 고백이다. 

 

아침 산책, 그리고 박물관
그의 글솜씨를 두고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글을 익히기도 전에 ‘文學’이라는 한자를 깨우칠 만큼 책이 많은 집 안 환경이, 문학과 생활을 동일시하면서 전문 작가의 소임을 다한 어머니 모습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문학을 꿈꾸면서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내려고 애쓴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그는 일상에서 내공을 쌓고 필력을 길렀다. 두 아들의 엄마이자 전업주부로 살면서 잊은 자존감을 일깨운 건 아침 산책. 산책길에서 만난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이 창작의 밑거름이 되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거나 가볍게 산에 오르는 등 산책을 즐겨요.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맑아지고, 어두운 마음이 긍정의 에너지로 바뀌죠. 혼자 길을 걷는 아침 시간을 기다릴 때도 많답니다.”

아침 산책만큼 소중한 일상은 박물관과 미술관 나들이. 그의 산문집을 펼치면 곳곳에서 예술을 향한 애정과 작품에 대한 깊은 조예를 느낄 수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에요. 중학생 때부터 전시회를 보러 다녔는데, 미술책이나 화집에 실린 작품을 직접 만나는 즐거움이 컸어요. 유명 작가의 초기 개인전에도 자주 갔죠. 천경자,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접한 뒤 황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이들과도 미술품, 공예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돈 벌면 엄마를 위해 그림을 사겠다’는 약속을 농담처럼 건네기도 한답니다.”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이란 이력은 오랜 관심사에 뿌리를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물관의 매력을 소개해달라고 주문하니 곧바로 “문학과 역사, 미술의 종합판”이라 답한다. 전시실을 거닐면서 작품을 마주하면 옛날 물건들이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는 얘기. 보고 듣고 발견하는 재미에 박물관 순례를 멈출 수 없다는 설명이다.


     
큰 나무 사이로 걷다
‘박완서의 맏딸’에서 ‘수필가 호원숙’으로 탈바꿈한 건 2006년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내면서부터.

가톨릭 동창 모임 카페에 ‘아침산책’이란 제목으로 쓴 글을 추려 한데 모았다. 

“어머니처럼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쓰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가는 기억들, 표현들을 간직하고 싶었거든요. 매주 두 편씩 글을 쓰는 건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기쁘고 즐거웠어요. 칭찬의 말을 아끼는 어머니도 반듯한 글이라고 격려하셨죠. 드디어 나만의 방을 가진 것 같아 뿌듯했답니다.” 

이해인 수녀의 추천사도 인상적.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들까지도 사색의 깊은 우물에 넣어 감칠맛 나는 언어로 건져 올리는 호원숙의 인생관은 아름답고 긍정적이며, 수수하고 지혜롭다.’ 간결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길지 않은 평이지만, 애정이 가득하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하루 한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은 열망이 싹터 올라 새삼 행복해진다’는 건 수필가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

문득 머리를 스치는 질문 하나. 산문집 제목에 담긴 속뜻이 궁금하다. ‘큰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물으니, “큰 나무는 작은 나무를 죽이지 않고 키운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울창한 숲, 큰 나무 밑에 자라는 작은 나무는 제대로 크지 못한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 선문답 같은 대화 속에서 그가 말하는 ‘큰 나무’가 시련을 묵묵히 이겨내도록 힘을 주는 ‘종교’이자, 딸의 새로운 도전을 마음으로 응원한 ‘어머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성서나 고전처럼 좋은 책 한 권도 작은 나무를 키우는 큰 나무예요. 큰 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가꾸는 노력이 쌓이면 언젠가는 키가 훌쩍 크리라 믿어요. 노력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으니까요.”

요즘 그의 우선순위는 어머니의 책. 1주기에 맞춰 나오는 전집을 기획·편집하는 작업에 참여한다. 뜰을 가꾸고 박완서 작가의 발걸음을 좇아 아치울마을을 찾는 문학 동호인들을 맞는 것도 그의 몫이다.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일상. 닮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에너지가 차오르면 다시 글을 쓰겠다는 그에게선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흐른다. 그 따뜻함에 키가 한 뼘 더 커진 느낌이다.


미즈내일 김혜원 리포터 pinepole@naver.com

 

수필가 호원숙은
우리나라 대표 작가 고 박완서씨의 맏딸이다. 경기여고,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뿌리 깊은 나무> 편집기자로 일했다. 1992년 박완서 연대기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을 썼고, 월간 <샘터> 에세이 필자로 활동했다. 2006년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내면서 수필가로 데뷔했으며, 올해 초 박완서 문학 앨범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현재는 모교 경운박물관 운영위원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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