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의 딸이며 신라 27대 왕으로 삼국 통일의 초석을 닦았고, 지혜가 남달랐다 전해지는 선덕여왕.
1천400년 전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 된 선덕여왕이 궁금하다.
그녀의 흔적이 경주 곳곳에 있으니 방학 맞은 아이들과 퍼즐 조각을 맞추듯 경주를 돌아보자.

 
 

“와~ 방학이다! 방학!”

“그래, 방학이구나….” 

아이들은 방학이란 단어에 환호성을 지른다. 늦잠 자고 컴퓨터게임에, 계곡이나 바다로 놀러 갈 생각에 잔뜩 부풀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실랑이하기 괴로운 엄마는 방학과 동시에 개학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래!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아이들과 여행 스케줄을 잡아본다. “얘들아 어디 갈까?” 이런저런 논의 끝에 경주로 발길을 잡는다. 주제를 하나 정해 그와 연관된 것을 찾아보기로 하니 이번의 주제는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근사한 여자였을 것 같아. 한 나라의 여왕이 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야! 그런데 엄마, 왕은 왜 대부분 남자예요?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어요?”

“누나, 여자가 무슨 왕이야? 왕은 남자가 하는 거야!”

아이들이 벌써부터 남녀 편 가르기를 시작한다.

1천400년 전, 한반도 남동부에 자리한 신라는 26대 진평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으니 덕만, 천명, 선화공주다. 화백회의를 통해 덕만이 왕위에 오르니 632년 1월의 일이다.

“선덕왕이 즉위하니 휘는 덕만, 진평왕의 장녀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의 성품은 관인(寬仁)하고 명민(明敏)하였으며 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삼국사기> 중

이렇게 해서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년)은 우리 역사상 첫 여왕이 된다. 선덕여왕은 민달천황의 황후였던 일본의 추고천황,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던 중국의 측천무후처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황후가 여왕이 된 것이 아니라 왕위 계승의 적통자로서 왕이 되었다. 중국의 측천무후보다 반세기나 앞서니 동양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

 

야간 조명이 멋진 첨성대
경주 곳곳에 남아 있는 선덕여왕의 흔적
“자 그럼, 선덕여왕과 관계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어디부터 갈까?”

“첨성대요, 첨성대! 거기부터 가요~!”

첨성대(瞻星臺, 국보 31호)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365개의 돌은 1년 365일을 상징하며, 본체를 이루는 27단은 첨성대를 축조한 선덕여왕이 27대 왕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또 중간에 있는 창을 기준으로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총24단)인데 이는 1년 12개월과 24절기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첨성대와 같은 관측물을 세워 계절의 흐름을 미리 알고 대비하려 했던 것을 봐도 여왕은 그만큼 뛰어난 왕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누나! 첨성대 앞에서 나 사진 좀 찍어줘.”

“알았어. 자, 김~치~. 근데 똑바로 좀 서라. 왜 그렇게 삐딱하게 서 있어?”

현재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다. 북동쪽 땅에 수분이 많아 무르며 호박돌이 깨져 아래쪽 기단석이 북쪽으로 1.91°, 동쪽으로 0.745° 기울어진 것. 선덕여왕 3년에는 ‘향기로운 사찰’ 분황사(芬皇寺)를 세웠고, 진흥왕 대에 시작되어 4대 왕 93년이란 시간을 들인 황룡사(皇龍寺) 또한 선덕여왕 대에 완성된 거대한 사찰이었다. 담장의 길이가 동서 288m, 남북 281m며 신라삼보(新羅三寶)인 황룡사9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이 지어졌는데 높이 82m로 서라벌 어디에서도 그 장엄한 모습이 보였다 한다. 아쉽게도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소실되었다. 실제와 똑같아서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머리를 부딪혀 죽곤 했다는 솔거의 벽화와 현존하는 종 가운데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보다 4배나 큰 종이 있었다고 하나, 이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선덕여왕과 김유신의 관계
“근데 아빠, 덕만이랑 김유신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김유신 장군 묘로 향하며 작은 녀석이 묻는다. 전에 본 TV 드라마 때문이다. 신라는 진흥왕 때 영토를 크게 넓혔고, 이에 자극받은 백제와 고구려는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두 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멸망한 가야 왕손 김유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으며,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른 전쟁터로 달려가곤 했다. 선덕여왕의 출생 연도가 밝혀지지 않아 답답하지만 선덕여왕 즉위년에 김유신이 서른여덟 살이었고 선덕여왕은 쉰 살 전후에 즉위한 것으로 보며,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러브 라인은 없으리라고 학계는 추정한다.

“그럼 TV가 잘못된 거네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드라마인데 왜 엉터리로 만들어요?”

역사 지식을 흐리게 하는 사극을 아이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반면 그 드라마로 인해 흥미가 유발된다면 그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되니, 어느 사람 말이 옳은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 묘에서 아이들은 자기 띠와 같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찾느라 난리다. 김유신 장군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장군 묘가 아니라 어엿한 왕릉이란 것, 해서 김유신 장군 묘는 왕릉에 버금가도록 화려하게 꾸며졌고 그 때문에 김유신 묘의 진위가 거론되기도 한다. 

 

 
‘여왕’으로서 선덕여왕
성골남진이라는 정통성에 명분을 싣고 여왕이 되었지만, 지금이나 예전이나 ‘여왕’에 대한 눈길은 곱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평왕 54년 ‘화랑 칠숙과 석품의 난’이 일어나니 선덕여왕 즉위에 반발한 귀족 세력의 난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당시에도 ‘여왕’이 파격임을 보여준 사건이다. 진평왕은 반란자들을 잡아 구족(九族)을 멸하는 초유의 강경책을 썼다. 여왕의 탄생을 부각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라도 여왕의 권력에 도전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의 앞길은 평탄치 않았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쪽의 공격에 시달렸는데, 여왕의 즉위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수세에 몰린 여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으니 당 태종은 “…임금이 부인이어서 이웃 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니. 나의 친족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을 삼고 군사를 보내어 보호케 하면 어떠한가…”라고 비아냥거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선덕여왕은 여자라는 약점을 극복하며 대외적으로는 전쟁 수행을, 대내적으로는 정치 개혁과 통합을 과제로 안고 있었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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