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통일신라 시대를 비롯해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경주로 역사 공부를 하러 간다. 그런데 이곳에 역사 교육만큼이나 인성 교육에 도움이 되는 장소가 있으니 시간을 내서라도 꼭 한번 들러보자.

 

 

“엄마, 아빠! 오늘은 어디에 간다고 했죠?” “음, 최부자집!”

“아, 이름이 최부자집이에요? 도대체 얼마나 부자면 이름이 그래요?”

“최씨 가문 집인데 정말 부자였고 12대에 걸친 300년 동안 만석꾼, 그러니까 인근에서 제일 부자인 집이었어.”

“와~ 근사하다! 근데 12대가 뭐예요?”

“12대는 12세대를 말하는 거야. 아빠 엄마와 너희는 한세대 차이가 나지, 또 할아버지 할머니와 너희는 2세대 차이가 나니까 12대를 계속해서 부자였다는 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야. 옛말에 부불삼대(富不三代)라하여 웬만한 부자라도 3대를 넘기가 힘들다고 했거든.”

“와~ 짱이다! 정말 부럽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나도 부자가 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그 사람들처럼 부자가 돼요?”

“궁금해? 그럼 오늘 최부자집에 가서 그 답을 찾아보자!”

 

 
300년을 이어온 경주 최부자집
끼이익, 다소 육중한 대문을 열고 한옥으로 들어간다. 여느 고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최부자집. 아이들이 집 안을 한 바퀴 휘익~ 둘러보고는 별거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온다.

“엄마, 모르겠는데요? 그냥 옛날 집이에요.”

“자~ 우리 여기 툇마루에 앉을까? 엄마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게.”

옛날  경주 근처 마을 촌장에게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눈처럼 희고 꽃보다 예쁜 설야였다. 그녀를 보기 위해 마을 총각들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총각들까지 설야네 집 담장을 기웃거렸는데, 어느 날 혼담이 들어왔다. 경주 최부자집이라했다. 경주 최부자집은 수 대째 내려오는 부잣집으로 그 집 논은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곳간에는 쌀이 그득그득하고 집은 99칸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축하하러 모여들었고, 부잣집 며느리가 되어 진수성찬에 비단옷을 친친 감고 살겠다며 부러워했다.

혼인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설야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향했다. 시댁은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근사했다. 시댁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무명옷 한 벌을 주며 설야에게 입으라고 했다. “엥? 엄마, 비단옷이 아니고 무명옷이에요?”

그렇다. 비단옷이 아니고 거칠고 볼품없으며 서민이 입는 무명옷이었다. 그것을 입고 나가니 시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아침 인사를 받았다.

“아가야, 이제 너도 이 집 식구가 되었으니 이 집에 전해오는 육훈과 육연을 전해야겠구나. 먼저 육훈(六訓)을 말하겠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마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는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또 육연(六然)은 직접 써서 주며 방에 걸어놓으라 했다. 자처초연(自處超然), 대인애연(對人靄然), 무사징연(無事澄然), 유사감연(有事敢然),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태연(失意泰然)하라는 것이었다.

“하여 너는 오늘부터 3년간 무명옷을 입고, 내가 말한 육훈과 육연은 가슴 깊이 새겨 그 뜻을 스스로 헤아리고 따르도록 하거라.”

 

무명옷 3년의 비밀
“엄마,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육연은 뭐고, 또 육훈은 뭔지….”

“그렇지…. 엄마가 계속 얘기할 테니 들어볼래?”

설야는 새색시라 곱디고운 비단옷을 입고 꽃같이 예쁘게 방실방실 웃으며 집 안을 찾는 이들에게 차나 대접하며 호강할 줄 알았다. 그런데 시집오기 전보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오히려 못해 서러웠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부자집은 99칸 거대한 집으로 하인이 100명이나 되었다. 이 집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다. 그런 것이 여럿 있어 곳간에는 쌀섬이 그득하고 논밭은 끝없이 이어졌는데, 아끼고 절약함이 심해 무엇 하나 맘 놓고 쓸 수 있는 게 없어 어느 때는 너무 약이 오르고 속이 상해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 심지어 낯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후한 대접을 했다. 최부자집이 받는 소작료는 한 해 3천 석, 그중 1천 석은 최부자집에서 썼지만, 과객을 대접하는 데 1천 석이 들었다. 이 얼마나 많은 양인가. 집 안에서는 밥 지을 때도 허락받을 만큼 쌀 한 톨을 아끼면서도 머무르던 과객들이 집을 떠날 때 마음대로 퍼가는 쌀뒤주는 언제나 차고 넘쳤다. 집 안은 항상 손님으로 가득 찼고, 이들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낮이고 밤이고 쉴 틈이 없었다. 혹 과객이 너무 많아 집에서 대접할 수 없으면 쌀과 과메기를 건네주며 근처 노비의 초가집으로 보냈고, 혹 소작농 집에서 과객을 접대하면 소작료를 아예 면제해주었다.

나머지 1천 석은 근처 빈민 구제에 썼는데, 이 또한 설야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최부자집은 인근 백성에게 할 만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을 내주고 받는 소작료는 보통 70~80%인데 설야의 시댁은 소작료를 50%나 그 이하로 받는다. 소작농이 앞다투어 최부자집에서 땅을 얻으려고 했음은 물론이다. 돈에 대한 욕심,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듯했다. 흉년이면 쌀 한 말에도 논을 헐값에 팔아 치우니 이때를 이용하면 손쉽게 땅을 늘릴 수 있는데, 땅을 사기는커녕 곳간을 열어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주었다. 마치 최부자집이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자신을 비롯한 시댁은 뼈 빠지게 일해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았다.

 

존경받는 부자가 되는 비결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다. 어느 날 아침 준비를 하는데 시어머님이 부르신다는 기별이 왔다. “아가야, 그동안 고생 많았지? 이 집에 온 지 오늘로 꼭 3년이 되었구나. 이제 그 무명옷은 그만 입어도 되느니라.”

설야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야 이 집 식구가 된 것 같은 느낌과 그동안 긴장하며 산 것이 떠오르며 기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고생스러워 남몰래 눈물 흘린 적도 많았다. 하지만 3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주위의 시선이었다. 비록 무명옷을 입었지만 ‘최진사댁 며느리’라는 것만으로도 오가는 사람들이 극진한 예를 표하고 그림자도 밟지 않았으니, 이는 비단옷을 입고 호사하는 것보다 더한 느낌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단아한 시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당에 서 있는 수많은 하인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자신을 격려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마루를 내려와 댓돌에 벗어놓은 신을 신으며 설야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중에 며느리를 보면 자신도 똑같이 무명옷 한 벌을 내주며 육훈과 육연을 전해야 한다고.

“얘들아, 끝~!” “그렇구나…. 엄마 조금 알 것 같아요. 성묵아, 너도 알 것 같지?”

“글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는 걸.” 옆에 있는 아빠가 한마디 거든다.

“얘들아, 재물은 분뇨(똥)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가 없지만,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좋은 거름이 된단다. 돈은 모으는 것보다 가치 있게 쓰는 게 중요하지.”

 

굴뚝 하나에도 이웃을 배려한 마음가짐 
아이들이 다시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러더니 큰아이가 뛰어오며 질문을 한다.

“그런데 엄마, 이 집에는 왜 굴뚝이 없어요? 손님이 그렇게 많았다면서요.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그랬을 텐데요?”

“응…. 이 집 굴뚝은 하늘로 향하지 않고 댓돌 옆으로 빠져 있단다. 저기 동그란 구멍 보이지? 혹 끼니가 어려운 사람들이 굴뚝의 연기를 보고 배고픔에 서러워질까 해서 굴뚝을 옆으로 낸 거야? 어때, 이해가 가니?”

큰아이는 두 눈을 끔뻑인다. 이에 질세라 작은아이가 또 질문을 한다.

“엄마, 근데요. 지금은 부자가 아닌 것 같아요. 그 많은 재산이 다 어디 간 거예요? 집도 생각한 것보다 작아요.”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최부자집의 시조는 신라의 학자 최치원의 17대 손인 최진립(崔震立, 1568~1636)이다.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도 공을 세웠으며, 아들 최동량(崔東亮)으로 이어지며 최부자집이라 불렸다. 그러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최진립의 28대 손인 최준(1884~1970)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보냈고, 해방 뒤엔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느끼고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웠다. 이 두 대학이 합해져 오늘의 영남대학이 되었으니 12대를 거쳐 내려오던 경주 최부자집의 재산은 모두 교육 사업으로 승화되며 오늘에 이른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길, 아이들과 육훈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참고 서적<5백년 명문가의 자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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