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음에는 꽃과 눈물이 산다


시인을 만난 것은 지난봄 옥천 지용제에서다. 그는 시민과 함께 문학열차를 타고 시인 정지용을 추억하는 자리에 있었다. 일면식도 없었건만 도종환 시인의 환한 웃음이 잠깐 의아했다. 순간 깨달았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뇌리에 ‘접시꽃 당신’의 슬픈 시인으로 갇혀 있었음을….
직업의식으로 명함을 건넸으나 시인은 여성지와 인터뷰는 고사했다. 그러나 교사로 오랜 시간을 보내온 시인의 교육철학은 우리 주부들에게 유의미할 것이라는 취지로, 계절이 지나 여름이 되었지만 인터뷰 약속을 지켜주었다.

 

독한 장마였다. 하늘은 흐리고 언제라도 비를 쏟아낼 태세였다. 시인이 정해준 약속 장소, 서울역사박물관의 뒤뜰에는 싱그러운 초록 숲에 노란 루드베키아가 한창이다. 시집을 읽으며 바라보는 창밖 풍경이 아름답다. 그리고 생각했다. 시인이 겪은 시대의 역사, 시의 역사, 사랑과 슬픔의 역사를. 찻집에 들어서는 시인의 웃음은 소박하고 기품이 있다. 미소가 접시꽃을 닮았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로 상징되던 시 ‘접시꽃 당신’을 빼고 도종환(57) 시인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아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낼 때 두 돌을 넘겼던 아들이 장성해 혼사를 치르는 동안 <접시꽃 당신>은 출간 25년이 되었다. 서점 판매대에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책들이 대부분인 출판계에서 25년 동안 매년 5천 부 이상 팔리는 <접시꽃 당신>의 힘은 무엇일까.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 ‘접시꽃 당신’ 중에서

<접시꽃 당신>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우리 인생의 근본 명제에 개인적 진정성의 힘이 더해졌다. 시인은 나이 서른둘에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생후 4개월 된 갓난아기와 두 돌 된 아이와 남겨진 그는 힘든 시간들을 시에게 기댔다. 교사를 하며 동인지에 발표했던 시 ‘접시꽃 당신’과 ‘암병동’ 등으로 장학사에게 불려가 시의 속뜻을 캐묻는 조사를 받고 결국 시골 벽지학교로 좌천된다.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과 절망을 버티며 빚어낸 시들로 시집 <접시꽃 당신>이 출간되자 뜻밖에 1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30대 초반에 얻은 큰 이름은 엄청난 부담이기도 했다.

“시골 학교 선생을 하던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한 시인이 됐어요. 감당하기 쉽지 않았어요.  아내의 죽음을 통해 이름을 얻는 시인이 되어도 되나, 라는 생각. 혹시 내가 슬픔을 팔아서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려면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개인적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겪는 아픔,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아픔을 함께 감당하는 일을 병행하다가 해직도 당하고, 감옥에도 갔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태어나서 ‘엄마’라는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린 딸에게  엄마를 찾아 주어야 했다. ‘접시꽃 시인’의 재혼 소식에 독자들이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사별 6년 만에 재혼을 했는데 어느 독자는 <접시꽃 당신>을 태워버렸다고도 하고, 속았다고도 했지요. 순정한 상징으로 남아주길 원하던 독자들에겐 배신일 수도 있고 작가로서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시인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보다 제 삶에서 중요한 일이기도 했어요.”

 

세상의 아픔 때문에 우는 사람,
시인
이제 보기 좋은 주름과 편안한 미소를 지닌 시인은 “지금 내 인생은 하루 중 몇 시쯤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최근에 낸 열 번째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가 그것이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중에서

치열하던 한낮의 삶을 비켜난 그는 조금은 쓸쓸하지만 여유로운 마음과 한층 성숙해진 시선으로 세상사를 보듬는다. 시인의 생에서 12시에서 1시는 교직과 함께 진보 문학 운동의 주역으로 열정을 바친 시기,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과 벽지로 좌천, 해직과 투옥을 겪은 고통과 절망의 극점인 시간일 것이다. 이후 과로와 심신 쇠약으로 급기야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쓰러진 것은 ‘그 뒤편의 벌레 먹은 자국’이 될까.

저무는 시간만 남았는데 이대로 어두워지는가. 3시에서 5시 사이에 서 있는 시인은 어두워지기 전 노을이 하늘을 찬란하게 물들이는 시간이 있음을 믿고 살자며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시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됩니다.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이 시심의 시작이죠. 남의 슬픔, 세상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시인이에요.”

그래서일까. 그의 산문과 시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은 그의 평생 시의 주제다. 촌에서 자라 늘 마당 구석의 화단 앞에서 놀던 기억, 길가 아무렇게나 핀 꽃들이 마음에서 자랐다. 꽃들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시인은 지금까지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도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고 사물을 관조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다/ 꽃밭을 보고 살구꽃 향기를 알게 되고 연분홍 그 향기를 따라가다 강물을 만났기 때문에 삶의 유장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시인은 ‘꽃밭’을 노래했다.

 

시련은 영혼의 담금질이다
그는 자연을 인간처럼 이해하고, 인간을 자연처럼 이해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고 맑은 통찰의 눈이다. 시인은 진주가 아름다운 것, 모과가 향기로운 것은 그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생의 지난한 부침마저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나 보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생각해 보니 축복이였다/그 절망 아니였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 것도/생각해 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였다
- ‘축복’ 중에서

“처음에는 원망의 대상이던 것들이 결국은 나를 키웠지요. 저의 생에 배치된 일련의 고통이 없었다면 다른 형태의 시를 썼겠지요. 고통 속에서도 새살이 돋는 희망에 대해 말하는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시련들이 결국 복이었구나 생각합니다.”

시인을 그렇게 키운 곳은 충북 보은군 내북면 속리산에 있는 ‘구구산방’이다.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쓰러진 뒤 모든 것을 접고 도피하듯, 유배지처럼 찾아 들어간 곳이다. 후배 화가가 암에 걸린 동생을 위해 지은 흙집인데, 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무조건 들어오라고 했단다.

“구구산방(龜龜山房)은 거북처럼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지만, 저는 거북처럼 느리게 살자는 의미로 바꿨어요. 우리 삶의 속도가 토끼처럼 빠르게만 살아가니 심신에 병이 들거든요. 산속에서 TV나 라디오, 신문도 없이, 오로지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슴에 품은 채 살았어요. 그러니 자연히 몸의 속도가 자연의 속도에 맞춰지더라구요. 먹는 것도 채식 위주로 바뀌고, 일과 사람을 끊고 나니 제 생활 자체가 자연의 일부가 되었지요.”

시인은 산방에 파묻혀 지내는 동안 건강도 회복했고 ‘자연이 내는 소리를 그저 받아 적는 느낌으로 쓴 시’들을 얻었다. 그 시들은 1년간 매주 한 편씩 ‘아름다운가게’에 기증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치유와 사랑을 세상에 돌려주는 참으로 시적인 방식이었다.

 

아이들과 전쟁보다 연애를 하자
시인은 교육 현장의 당사자로서 교육 현실의 오랜 모순을 변혁하고 교육 민주화와 참교육을 위해 전교조 결성 이전 단체인 전국교사협의회 일에 참여했다. 그러다 국가공무원법 위반, 집단행동 등의 이유로 즉각 해직당하고 감옥으로 가는 등 예상치 못한 고난의 길을 걸었다.

“해직되고 10년 동안 밖에서 교육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많이 준비했어요. 특히 대안을 마련하는 프로그램을 아이들에게 적용하고 싶었는데, 복직 후 처음 6개월 동안 실패를 반복했어요. 그러다가 ‘아이들과 전쟁은 그만 하고, 연애를 하자’고 생각을 바꿨죠. 내가 개발한 이론적인 프로그램을 다 버리고 아이들과 친해지자, 있는 그대로 아이들과 만나는 일부터 출발하자고 했는데, 다행히 그것이 통하더군요. 이후 5년 동안 많은 보람과 성과가 있었고, ‘신나는 학교 상’을 받은 학교로 변했어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시인은 훈련으로 명마나 사냥견을 만들어내듯 틀에 넣어 이끌어가는 ‘동물 훈련론’ 식의 교육을 경계한다. 또 햇빛, 바람, 물만 있으면 성장하는 식물처럼 정원사 역할만 하면 된다는 ‘식물 성장론’ 식의 교육관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추구하는 교육철학은 ‘각성적 교육관’이다.

“소가 졸다가 쇠파리가 따끔하게 쏘면 꼬리를 치며 잠에서 깨어나죠. 이처럼 작은 자극을 주어 스스로 각성하게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제 발로 걸어가도록 늘 관심을 갖고 대화나 질문, 어떤 태도를 보이며 적절한 자극을 주는 것이죠. 무리한 요구, 조바심, 다그침, 욕심, 이런 과잉 교육은 아이들의 심성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젖은 꽃잎 비에 다시 젖으며/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아있는 꽃잎들이 그렇게 말하며 울고 있었다.

그의 시 ‘카이스트’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학원도 없고, 수업 시수도 적고 뒤처지는 아이를 배려하며 공교육이 책임지는데 2001년부터 학력평가 1위를 차지한 핀란드의 교육을 주시했다. 1학년에서 9학년까지 9년 동안 담임 2~3명이 이끌며 탄력적 학년제를 운영하고, 능력에 맞는 학습 목표를 부모와 교사, 학생이 함께 정해 앎의 기쁨에 대해 각성할 날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는 다이아나 루먼스의 시구를 들려주는, 겸손하면서도 온유하고 불의 앞에서는 분노할 줄 아는 우리 시대의 도종환 시인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과 헤어지는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으로 장맛비가 축축이 내리고, 젖는 음영 속으로 여름 오후가 고인다. 시인이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시간, 5시 이후에도 사람과 사물을 향한 그의 사랑이 더욱 치열해지기를 기원했다.


미즈내일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도종환 시인은
‘앞에는 아름다운 서정을 두고 뒤에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두고 끝내 그것을 일치시키는 시인’으로 불린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1977년부터 2003년까지 27년 동안 교직에 있는 동안 전교조 활동 때문에 해직되고 투옥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교육 운동을 했다. 교사의 길과 시인의 길을 함께 걸어왔으나 건강 악화로 학교를 그만두고 보은의 산방에서 지냈다. 초등 교과서에 ‘병아리 싸움’이, 중학 교과서에 ‘어떤 마을’이, 고등 교과서에 ‘흔들리며 피는 꽃’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담쟁이’등 시와 산문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넥스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