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앓은 뒤 더 아름다워진다

 
지금은 위로 받고 싶은 시대다. 예전보다 좋은 옷과 맛난 음식과 화려한 볼거리가 넘쳐나는데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외롭다고 호소한다.
출판계에 치유를 주제로 한 책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여자라면, 게다가 엄마라면 무릎을 치며 공감할 신달자 시인의 신간 에세이가 여성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따끔한 훈육도 함께. 언제부턴가 젊음이득세하면서 슬그머니 사라진 ‘진짜 어른’이 들려준 따뜻한 조언.


지갑에 지니고 다니는 엄마의 사진 한 장이 있다. 곱게 한복을 입은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사진 속 엄마의 나이가 참으로 멀게 느껴진 때가 있다. 오르기에 너무 높은 산 같기도, 끝없이 내달리는 기찻길 같기도 한 사진 속 엄마의 나이가 되었다. 그 나이가 되기까지 ‘마흔 앓이’가 심했다. 독감이 들기 전의 오한처럼, 생리 전 찾아드는 불편한 손님처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형벌처럼 느껴졌다. ‘마흔’은 여성성을 잃어가는 나이, 무엇인가 성취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시인은 ‘마흔은 무엇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을 시인은 어떻게 알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무엇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고 강요하는 사회를 향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다고 항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여성으로서 여전히 아름답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시인이 살그머니 여성들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신달자(68) 시인의 신간 에세이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이 발간 3주 만에 1만 부가 판매된 데는 아마도 같은 여성으로서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시인이 여성들의 마음을 잘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딱 걸렸네, 유리알 마음
나는 언니도 친정엄마도 안 계시기에 누구와 살아가는 얘기를 할 곳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나에게 언니였고 엄마였다. 척박한 내 마음에 위안이 돼주었던 책. 이 세상은 자기가 일구는 밭이다.  - 독자 리뷰 중에서

시인의 에세이를 읽은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해답지를 들여다보듯 어쩌면 누구나 아는 얘기고, 스스로 수없이 결론지었던 정답일 수도 있다.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인데도 후회와 회한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앉은 자리에 뿌리라도 내리려는 듯 자리를 뭉개고 앉아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누군가 따끔하게 혼을 내줬으면 싶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줬으면 싶다. ‘하루 종일 TV를 보고 컴퓨터를 하다 밖으로 나가 점심을 먹고 마사지를 받으며 쇼핑을 하는 것이 일상’이라는 한 독자는 “어쩜, 어쩜, 어쩜”이란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책 속에 빠져들었단다.

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 시작은 해야 하는데… 수천 번 수만 번 이 말을 되씹으면서 세월은 흘러간다. 왜 세월은 또 그렇게 빠른 것인지….  -<여성을 위한 인생 10강> 중에서

어쩜 시인은 이렇게도 내 마음을 잘 알까? 유리알처럼 훤히 내 마음을 시인에게 다 보인 듯 부끄럽다.

한편 내 마음을 알아주고 처방전을 내려주니 그 또한 고맙다. 독자들이 이토록 공감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시대를 잘 읽었기 때문 아닐까요? 이 시대의 여성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았죠. ‘여자들 세상이다, 여성 상위 시대다’라고 하지만 요즘 주부들, 여성들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얼마나 많이 방황하는지 그 속이 얼마나 끓는지 알아줬기 때문이죠.”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남편조차 힘들다, 외롭다, 아프다 소리쳐도 들은 척하지 않던 속내를 시인이 읽어준 것이다.

 

힘들어도 한 발, 또 한 발
어머니가 외출했다 늦게까지 안 오시면 ‘왜 안 오시지?’ 생각했다가도 ‘그래 차라리 안 오시면 좋겠다’ ‘더 좋은 곳에서 사셨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 중학생 딸이 쓴 편지 중에서

교수였던 열다섯 살 연상의 남편이 결혼 7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시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막내가 두 돌이 안 됐을 때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까지 몸져누워 9년 동안 병상을 지켰다. 남편은 무려 24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 어떤 단어로도 담아낼 수 없는 세월이었음을 시인의 어린 딸도 감지했던 걸까? 중학생이던 시인의 큰딸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가슴에 파고든다.

“반납할 수만 있다면 반납하고 싶었죠. 그런데 물리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에요. 이를 악물었던 것은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된다는,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죠. 세 아이의 엄마라는 것과 인간답게 살길 원한 내 어머니의 혼이 함께 했던 것 같아요.”

간병인조차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는 상황. 집안을 이끄는 가장의 역할과 두 사람의 간병인 역할까지 해야 했다. 그 힘든 과정에서도 시인은 마흔 나이에 대학원을 선택했다. 누구는 ‘그 나이에 그걸 해서 뭘 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시인은 당시의 선택을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기특한 일이라고 여긴다. 석사를 시작해 박사 학위를 받고 쉰 살에 교수가 되기까지 꼭 10년이 걸렸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피를 찍듯 가 나 다를 연습해서는 3년 만에 딱 한 장 딸에게 쓴 편지
“내말 잇지마라라 주글대까지 공부하거라 돈 버러라 에미갓지 살지 마라라 행볶하여라”
종이 위에 쏟아 놓은 어머니의 비릿한 각혈 한 덩어리 - ‘각혈’ 중에서

‘제발 나처럼 살지 마라’ 했다던 시인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시인이 교수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인의 딸은 고생의 불더미에서 사는 엄마를 보며 똑같은 말을 했단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시인의 어머니에게 오래전에 한 말을 딸에게 들은 것이다.

누군들 고생이 하고 싶으랴.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인생은 예기치 않은 일의 연속이라고….

“40대는 아직 인생의 아기들입니다. 결혼한 여성이라면 육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자기를 자각하는 시기죠. 그런데 여성들이 사회에서 소외감이 드는 것은 비교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TV나 라디오를 켜면 잘나고 성공한 여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거기서 오는 박탈감으로 주눅이 드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지 이웃집 여자가 아니에요. 어떻게 갑자기 10억을 벌고 갑자기 유명해집니까? 40세인 여성이 100세까지 산다고 할 때 60년이 남잖아요. 거기서 10년만 떼어서 자신을 개발하는 데 쓴다면 남은 50년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무엇이 되었다’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다’가 중요합니다.”

마흔은 무엇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는 격려에 힘이 실린다. 제발 1, 2절만 해놓고 안 된다고 스스로 결론 내리지 마라. 한꺼번에 되는 일은 없다고.

 

‘엄마’로 사는 일, 가장 어렵고 행복해
신달자 시인 앞에 붙는 수식어는 소설가, 수필가, 교수, 엄마, 아내, 며느리 등 다양하다. 과연 시인에게는 무엇으로 사는 것이 가장 즐겁고 또 가장 힘들까?

“엄마로 사는 게 가장 힘든 것 같아요. 자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요즘은 딸들과 동대문시장에 가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도 합니다. 딸이라기보다 친구죠. 딸들이 다 커서는 엄마를 부러워해요. 그런데 자식이 자라니까 조심스럽더라고요. 강의를 많이 하니까 아이들 얘기를 해서 누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요.”

세상에서 자식이 가장 어렵다면서도 시인은 자녀 교육 때문에 직장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안타깝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아마 감옥에라도 웃으며 갈 정도로 40대 한국 여성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을 자녀 교육으로 꼽지만, 자녀의 성적 향상을 위해 여성이 직장을 포기하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 오히려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이는 것이 자녀 교육에 더 유익하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시인의 어머니 바람처럼 일하는 여성이 된 자신도, 시인의 바람대로 전업주부가 된 시인의 딸도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행복하다면 족하다.

시인은 매일 아침 ‘감사합니다’ 라는 말로 아침을 시작한다. 2005년 암 진단을 받았고, 지금은 류머티즘성관절염으로 손가락 마디가 뒤틀려 통증에 시달리다가도 병원에 가면 저절로 겸손해진다.

“그곳에는 나보다 아픈 사람이 많죠. 장애아를 둔 엄마도 있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절로 마음을 비우고 감사한 일이 많아지지 않던가요? 세상은 감사한 만큼 행복해집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어려움을 겪었다지만 시인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어린아이가 앓은뒤 몰라보게 크는 것처럼 여자는 앓은 뒤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시인의 삶을 사랑한다. 시인의 삶이 또한 우리 여성들의 삶이니까….


미즈내일 최원실 리포터 goody23@naver.com
사진 이운영

 

신달자 시인은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 여성지 <여상>으로 등단했다. 1972년 <현대문학>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남편과 시어머니의 간병인으로, 세 아이의 엄마로 ‘최악의 30대’를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마흔에 석사를 시작해 쉰에 박사와 교수가 되었다. <겨울축제> <고향의 물> <아가> <종이> 등 여성 특유의 감각적 심미감을 드러내는 시집을 다수 발표했으며, 수필집 <지금은 신이 너를 부를 때> <백치 애인> 등과 소설집 <물 위를 걷는 여자>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등이 있다. 최근 발간된 에세이집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이 독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저작권자 © 넥스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