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용서하기 전까지 나는 이방인이었다”

다문화 아이들 흡수하는 성숙한 한국사회 만들고 싶어
이 시대 아버지들 위한 공연 하는 것이 목표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아버지 가사 중.
 
가수 인순이가 ‘아버지’라는 노래로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한국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는 인순이는 이 노래를 통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를 용서한 것일까.

어둑새벽같은 피부색에 곱슬한 머리를 한 어린 소녀가 거칠었던 한국의 70년대를 살아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인순이에게 군부대 ‘미군오빠’들은 말동무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들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28일 오후 서울 신사동 한 찻집에서 만난 인순이는 ‘이방인’의 인생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극복했나요.
“전쟁이었어요. 그들은 본국에 처자식이 있었고, 타국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했고, 그 결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못진 것이죠. 비극입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쓰지 않겠습니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 아버지를 놓은 것 뿐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요.
“올해초 미국 스포츠스타 토비 도슨을 만났어요. 나는 미국사람의 모습으로 한국에 살고, 그는 한국사람의 모습으로 미국에 살죠. 각자 사는 나라에서 모두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방인은 두 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삶, 그리고 아버지의 삶.”


 
인순이는 올해초 박선규 문화부 차관의 주선으로 토비 도슨을 만났다. 두 명 모두 각자의 나라에서 다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국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에 감동하고 있다. 토비 도슨은 한국에서 살아온 인순이의 이방인의 삶에 상당한 공감을 표했다고 한다. 토비 도슨은 지난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날아가 고국을 위해 동계올림픽 유치 프리젠테이션에 참가했다.

인순이는 지난해 2월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올랐다. 그곳에서 ‘아버지’를 불렀다. 그곳에서 아마,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모두 털어냈으리라. 미국사회도 울었고, 인순이도 울었다. “아, 이제서야 아버지의 나라에서 내가 인정받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사실 상업적 공연이었고 개인적 목적도 있었지만, 민간외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포함해 참전한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도 될 것 같아요.”


 
카네기홀 공연은 한국정부가 할 일을 인순이가 대신 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공연이 끝나고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박선규 차관이 연락이 왔어요.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해 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가수들이 외교관입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비자 문제 등의 행정적 지원을 부탁했어요. 얼마전 예술의전당이 대중가수의 공연을 불허한 사건 등을 봤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지금은 박 차관과 이같은 문제 등을 의논하는 사이가 됐구요.”


 
인순이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는 데 50여년이 걸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를 미워할수록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그런 인순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달고 나타난 것은 의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사회에 충고 한 마디 한다면.
“다국적사회를 넘어 다문화사회가 된지 오래입니다. 제가 한국 땅에서 가수로서 이렇게 성공하고, 또 다른 이방인들이 이 곳에서 역할을 할 때 그런 배척 문화는 스스로 없어질 겁니다. 지금은 동남아쪽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한국사회가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다문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요.
“다문화 인구가 늘어나 이제는 이 인구를 빨리 흡수하지 않으면 뒤에 가서 힘들어 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들을 흡수해 다국적 사회에서 중요한 인력으로 키워야 합니다. 사례를 하나 들어볼께요. 동남아 사업을 위해 진출하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기업에서 다문화 아이들을 채용해서 그들의 모국에서 활동하게 하면 그들은 한국을 또 하나의 조국으로 생각할 겁니다. 저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인순이는 그 꿈을 이뤘다. 간호사처럼 누군가를 치유하는 일이다. 그는 아버지라는 노래로 옆에 두고도 아버지를 잃고 사는 사람들을 치유했다. 한 가요프로그램에서 그가 부른 노래 ‘아버지’는 시대를 자극했다.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한 이름 아버지를 다시 부르게 했고, 오랜만에 시골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게 만들었다. 간호사가 되지 않고도 그는 꿈을 이룬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인순이는 다시 뮤지컬에 도전한다. 일주일에 두 번 ‘캣츠’ 공연에 출연하는 그는 아직도 청춘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 아버지이자, 남자들을 위한 무대를 여는 것이 남은 목표라고 한다. “아버지와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저는 모두 치유된 것 같아요. 이제 그들을 치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남자들만을 위한 공연을 기획하고 싶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문화다국적 아이들이 자신과 같은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한국사회를 치유해야겠다는 마지막 목표도 생겼다. 음악을 통한 치유의 길을 찾은 인순이는 다문화다국적노래단의 예술감독을 맡았다. 한국사회에 다문화 뿌리를 내리는 날, 인순이는 비로소 남자들을 위한 공연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내일신문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차별 딛고 최고 여가수 등극
1978년 희자매로 데뷔한 인순이는 노래보다는 외모로만 주목받는 등 혹독한 연예계 생활을 견뎠다.

1981년 ‘밤이면 밤마다’로 이름을 날리며 가요계를 평정한다. 10여년동안 잊혀진 가수로 지내며 나이트클럽 등에서 노래해오다 1996년 ‘또’를 선보이며 다시 한번 활동을 시작한다. 비슷한시기에 대학 교수와 결혼해 외동딸 세인을 낳았다.

2009년 17집 ‘인순이’를 발매했고, 그 중 수록곡인 ‘아버지’는 2010년 5월 첫째주 방송횟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인순이는 1999년 이후 미국 카네기 홀에서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두 번째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인순이는 ‘나는 가수다’에 출연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뮤지컬 ‘캣츠’에서 그리자벨라 역을 맡았다.

지금까지 14장의 정규 앨범을 포함해 총 19장을 발표했다. 다문화 아이콘 가수 인순이는 데뷔 후 30년간 끊임없이 활동하면서 한국의 최고의 여가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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