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20년 후, 30년 후의 청사진을 그려본 적이 있는가.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60~70대에 들어선 여성이 자신감과 매력을 발산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예능 늦깎이로 만개한 ‘젊은 언니’ 배우 선우용여씨를 보며 용기와 기대를 갖는 것은 최선을 다한 삶의 결과는 언제나 성공한다는 것을 그녀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 나는 여자다
춤과 사랑이 나를 키웠다
아버지가 서울신문사(당시 경서일보)에 근무해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이태원 토박이다. 4·19혁명 이후 신문사가 문을 닫으며 형편이 어려워졌다. 당시 김백봉 선생에게 장구춤이며 부채춤, 칼춤을 사사하고 김문숙 선생에게 살풀이춤까지 배운 그녀는 이태원 외국인 주택을 중심으로 아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녀 역시 여자로서 행복했던 시간은 한 남자에게 흠뻑 사랑을 받은 연애 시절이다. 나이 차가 열 살이나 되고 8남매의 장남이었지만, 눈에 콩깍지가 씐 그때는 아무것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솔직하고 호탕한 성격, 미남에 못하는 운동이 없고 사회적으로 능력있고 저를 공주처럼 아끼고 사랑하는데 어떻게 빠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 생에서 연애 기간 1~2년이 가장 행복했던 때 같아요. 그때는 그 행복의 대가를 평생 치를지 꿈에도 몰랐지요.”

 

# 나는 아내다
남편은 결혼식 날 나타나지 않았다
8남매의 맏며느리가 어디 쉬운 자리인가.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했지만, 끈질긴 남편의 구애를 물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결혼식 날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남편이 지인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고스란히 그 빚을 떠안은 것. 남편은 결혼식이 난장판이 될까 봐 나타나지 않았다. 최고의 배우였던 선우용여는 신문 1면을 장식하며 온갖 루머의 주인공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한 달 뒤 결혼식을 올렸지만, 신혼집에 시어머니는 물론 시동생 5남매가 모두 들어와 함께 살았다. 

“결혼식하고 싶으면 사인하라는 빚쟁이들의 압력에 뭔지도 모르고 사인했죠. 당시 돈으로 1천750만 원. 그때부터 빚을 갚기 위해 미친 듯이 일만 했어요. 예술을 위한 연기라기보다 먹고살기 위해 연기를 한 거예요. 그때가 임신 3개월이었는데 물에 빠지는 연기까지 감수하며 한꺼번에 영화 13편을 찍는데, 밥과 김치만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영양실조로 급성 황달까지 걸렸어요.”

화려한 여배우의 뒤안길은 그처럼 참담했다. 영화 <아씨>를 촬영하며 큰아이를 출산했고, 3일 만에 다시 촬영장에 갔으니 체력적 한계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신혼의 단꿈과 설렘을 빚 갚는 데 바친 원망과 후회가 얼마나 사무치랴 싶다. 그런데 그녀는 원망보다 자신의 운명으로 돌린다.
“친정어머니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인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네가 선택한 결혼이니 끝까지 책임져라, 여자가 돈 번다고 절대로 남편에게 유세하거나 큰소리치지 마라, 여자가 버는 것은 그렇게 새어나가게 마련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나의 업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지요.”

선우용여씨는 그 결혼이 불행의 시작임을 알면서 남편의 빚을 떠안았다. 아마 요즘 젊은이라면, 더구나 연예인이라면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어도 이쯤에서 이별을 고할 것이다. 연인의 보험금을 자기 앞으로 돌려놓고 연인을 죽이기까지 하는 세상에서 배우자의 빚을 떠  안으며 생고생을 각오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배우로서 자존심도 버리고 들어오는 대로 일을 하며 독하게 돈을 벌어 7년 만에 빚을 갚을 무렵, 그녀는 다시 청천벽력을 만난다. 집 안에 다시 ‘빨간 딱지’가 붙은 것. 이 역시 남편의 잘못은 아니고 전 주인이 남긴 빚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선우용여씨는 그 길로 가출해서 친정으로 갔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더욱이 시어머니는 암 투병 중이셨어요. 그런데 친정엄마는 냉정하셨어요. 이틀만 자고 쫓겨났지요. 남편과 6개월간 별거했는데, 이상하게도 일이 안 들어오고 나 하나 겨우 먹고살 만큼만 수입이 생겼어요. 그때 깨달았죠. 나 혼자 잘나서 돈 버는 게 아니라 남편, 함께 사는 가족의 기도와 기운으로 그들 몫을 내가 벌고 있다는 것을요. 가족이 많을수록 나누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한 기회가 되었어요.”

 

# 나는 엄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소박함
“평생을 배우로 살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죠. 그러나 가정에서나 일에서 아이들도 ‘엄마가 참 열심히 살았구나’ 인정해주니 고맙죠. 저의 좌우명은 ‘최선을 다하자’예요. 가정과 연기, 두 가지 모두 치열하게 살았지요.”

교회 권사였던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키워주었는데, 며느리는 늘 예쁘게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아셨다. 어느날 일곱 살 된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옆집 엄마는 왜 집에 있어?” 엄마는 늘 치장하고 나가는 사람으로 알았던 자식도, 시어머니도 배우는 그저 멋 부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한겨울에 촬영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 시절만 해도 헤어스타일부터 화장, 의상, 소품까지 다 배우가 챙겨야 했다. 전쟁 같은 촬영 현장을 본 뒤 아이들이 달라졌다. 엄마가 쉴 수 있도록 까치발을 하고 다니며 스스로 철이 들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생전 자기 엄마에게 진 빚을 대신 자식에게 갚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 때문에 마음고생 하신 친정엄마를 생각하며 딸에게 관대해집니다. 자식을 낳아봐야 엄마를 이해하는 것도 그런 이유죠.”

연기를 통해서나 가정에서 엄마라는 역할이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는 그녀는 30대 후반 연기 생활을 뒤로하고 돌연 미국행을 결정한 것 역시 엄마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회상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이들이 대학 들어갈 때까지는 연기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8년 동안 식당을 경영하며 아이들을 뒷바라지했는데 원래 소심하던 성격이 미국에서 장사하며 억척스러워진 것 같아요.(웃음) 생활인 선우용여가 된 거죠. <세바퀴> 같은 프로그램을 보시고 저의 망가진 모습에 대리 만족한다는 분도 계시는데, 사실 제 모습 그대로예요. 이제 꾸미고 감출 나이는 지났으니까요.”

시댁 식구와의 생활, 남편의 빚 해결 등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왔을 그녀는 연예인이라면 어느 정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평생 명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단다. 자신을 위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한, 평범한 어머니였던 것이다. 집에 일을 도와주러 온 아주머니조차 “배우가 왜 이렇게 옷이 없냐”고 물어볼 정도로 소박하게 살아왔다. 한때 유명 가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딸 최연제씨도 엄마의 검약을 보고 자라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엄마에게 가끔 보내는 선물 역시 저가의 스웨터 정도다. 연제씨는 결혼 뒤 한의대에 다시 도전, 미국에서 한의사로 활동 중이다.

당연히 명품으로 멋을 내고, 적당한 사치와 생활을 즐기리라 여겨지던 그녀의 인상이 180˚ 달라졌다. 세상을 보는 시선에 악의가 전혀 없다. 시종 사랑스러운 만년 소녀를 보는 듯하다.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선우용여는 인간적이다.

 

# 나는 배우다
연기, 감사와 재미로 충만한 삶
“연기는 나의 인생이고 삶이기에 뭐라고 정의할 수가 없어요.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해 그 인생을 연기했고, 일상으로 돌아와 엄마로 살았죠. 바람이 있다면 드라마를 통해 긍정의 힘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 시대 어머니상을 정립하는 데도 몫을 하고 싶고요.”

최근에 막을 내린 KBS-2TV 주말연속극 <사랑을 믿어요>에서 그녀는 성실한 주부로, 속 깊은 시어머니로, 지고지순한 아내로 늙어가는 이 시대의 어머니를 연기했다. 아마도 현재의 그녀와 가장 근접한 모습일 것이다.

“연기한 지 48년이 됐어요. 연기는 패션과 같아서 사람들 취향이 자꾸 변하니까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늘 새로움과 변화를 찾아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리죠. 배우니까 예능 프로그램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해요. 주어진 일이라면 뭐든 재미있게 해야지. 그래서 삶이 늘 재미있고 감사해요. 사람들이 늙지 않는 비결을 묻는데, 내겐 감사하는 마음과 재미가 불로초예요.”

60대 후반의 여배우로, 어머니와 아내로 살아온 그녀의 인생관은 참 맑았다.

“베푸는 것만큼 받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렇지만 베푸는 마음이 하나하나 쌓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는 파란 많던 삶을 돌아보며 원망도 자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히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그 이름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미즈내일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저작권자 © 넥스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