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초가지붕 위를 비춘다.
지붕 위에 머무르던 햇살은 발갛게 익어가는 감나무 위에 앉았다가 새색시처럼 볼 붉히는 석류 위로 날아간다. 잠시 후 돌담 휘돌아 나가는 골목을 지나 양진당과 충효당을 맴돌다 삼신당 종잇조각에 올라앉는다.
물돌이동 하회마을의 오후 풍경이다.

 

“우와~ 이 마을 정말 예뻐요. 마치 영화에 나오는 곳 같아요.”
아이들의 눈은 참으로 정확하다. 걸음걸음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하회마을은 천하의 명당이며 동양화 속 마을 같다. 낙동강 줄기가 태극 모양을 그리며 돌아 부용대 아래서 방향을 틀어 북으로 흐른다. 그래서 물돌이동 하회(河回)다. 강물 건너편으로는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화산(328m) 줄기가 버티고 서 있다. 하여 하회마을의 지형을 말할 때면 배산임수(背山臨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하는 풍수지리 용어가 반드시 등장한다.

 

명당에서 인물 난다?
“이 동네에선 훌륭한 분이 사셨을 것 같아요. 어떤 유명한 분이 사셨어요? 분명 근사한 분일 것 같아요.” 명당에서 사람 난다는 말을 아이들도 아는 것일까?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곳 하회마을에서는 600년 전부터 풍산 류씨가 살았다. 지금도 150여 가구 중에서 75%가 풍산 류씨로 조선 시대에만 대과 급제 21명, 무과 급제 5명, 생원·진사 합격 73명을 기록했으니 소위 뼈대 있는 집안이다. 풍산 류씨 가문 사람으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있고, 한류 스타 류시원도 있다.

“류시원은 알아요. 그런데 류성룡이란 분은… 훌륭하신 분인가 봐요.”

“그럼, 아주 훌륭한 분이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분이니까!”

“예?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어요? 그건 이순신 장군이잖아요!”

역사란 그런 것인가 보다. 승자가 있기 위해서는 그 배경도 필요한데 말이다. 류성룡(柳成龍, 1542〜1607년)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다.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로 중종 37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 살 때 <대학(大學)>을 읽었다고 한다. 류성룡은 스물한 살 되던 해에 도산서원으로 가서 퇴계 이황에게 배웠다. 3년간 배운 뒤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길로 나갔는데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1591년 이조판서에 우의정을 겸하던 류성룡이 일본의 침략을 눈치 채고, 전쟁에 대비해 장수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추천한 사람이 권율과 이순신이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비상한 류성룡
“아하~ 그렇구나. 나라를 구한 사람들을 추천했기에 나라를 구했다고 하는구나.” 단순히 추천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소개하는 뛰어난 인물이 여럿 있었는데도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으니, 과연 류성룡 선생은 인재를 알아보는 남다른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권율과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일궈냈다.

“대단하네, 그분들이 훌륭한 일을 할 걸 어찌 아셨을까?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나?” 퇴계 이황 선생이 류성룡를 가르칠 때 ‘저 아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과연 나라가 위험에 처한 임진왜란 때 류성룡 선생의 활약은 대단해 마치 임진왜란을 치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고 한다. 통신사를 보내 일본의 움직임을 살피고, 명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렸고, 명나라 군대가 오자 직접 맞이하며 싸움을 이끌었다. 또 전쟁 중에 임금의 지나친 도피를 막았고, 백성의 힘을 북돋워 의병이 일어나게 했으며, 무엇보다 권율과 이순신을 추천해 전쟁에 대비한 것은 가장 돋보이는 활약이었다.

 

충효당의 정갈한 안뜰
하회마을은 문화재가 그득한 류성룡 마을
따끈따끈 등을 어루만지는 햇볕을 즐기며 하회마을 모퉁이를 돌아서니 고풍스런 집들이 가득하다. 양진당(보물 306호), 충효당(보물 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90호) 등 건축물이 많으니 눈길 닿는 곳 모두 문화재며 귀중한 자료다. 이중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으로, 후손과 문하생이 류성룡 선생의 덕을 기리는 위해 지었다. 그 옆에 있는 영모각은 <징비록>(국보 132호), 류성
하회마을 중심에 있는 삼신당
룡 종손가 문적(보물 160호), 류성룡 종손가 유물 (보물 460호) 등 각종 유물과 귀중한 문서들이 보존된 곳이다. 충효당 마루에서 바라보면 대문 밖으로 낙동강이 보이고, 그 너머로 가파른 절벽이 보인다. 선생이 이 풍경을 보고 자신의 호를 지었으니 서애(西崖)는 ‘서쪽 벼랑’이란 뜻이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노라니 마을 복판에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삼신당이다. 이곳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이 펼쳐진다. 각자의 소원을 적어놓은 소지가 바람결에 펄럭인다. 아들 녀석이 몰래 소원을 적는다. 트랜스포머가 갖고 싶다고. 마을을 빠져나와 강변 솔숲을 따라 걷는다. 만송정 솔숲(천연기념물 473호)은 450여 년 전 마을 서쪽의 약한 지기(地氣)를 보완하기 위해 심은 일종의 비보림(裨補林)으로, 바람을 막는 방풍림과 모래를 막는 방사림, 홍수 때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는 방수림의 역할을 한다.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601년) 선생이 조성한 인공 숲이다.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
겸암 선생이라 불리는 류운룡과 서애 대감이라 불리는 류성룡은 형제다. 겸암과 서애, 나이 차이가 세 살에 불과한 형제는 퇴계 아래에서 동문수학했으나 대사헌, 병조판서, 영의정 등 정치 관료 활동을 많이 한 서애 대감에 비해 겸암 선생은 관직이 높지 않은 숨은 선비였다. “아빠! 그럼 동생이 형보다 훨씬 똑똑했나 봐요. 높은 벼슬을 많이 했으니까요.”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겸암도 아우 성룡과 함께 퇴계 선생에게 배웠고 똑똑했단다. 물론 벼슬길로 나아갔지만 출사(出使 : 벼슬자리에 나아감)와 사퇴(辭退 : 일을 그만두고 물러섬)를 거듭했지. 어머니의 신병, 어버이 봉양이 주된 이유인데 겸암의 잦은 퇴사(退仕 : 임무를 그만두고 물러남) 덕분에 아우 서애가 집 걱정을 잊고 정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겸암이 서애보다 여러 면에서 앞선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두 사람은 우애가 무척 깊었단다. 두 분이 우애를 나누면서 걸었던 오솔길을 걸어볼까?”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다 보면 부용대가 보인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힐 때 쯤 태백산맥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높이 64m 부용대에 도착하는데, 음력 7월 보름이면 부용대 아래서 시회와 선유(船遊) 줄불 놀이가 벌어졌으니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민간전승 놀이다. 부용대를 중심으로 겸암정사(謙菴精舍)와 옥연정사(玉淵精舍)를 잇는 오솔길은 형제가 왕래하던 길이며, 두 사람의 시에 자주 등장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전하는 공부의 비법
“그런데 누나, 궁금한 게 있어.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잘났을까?”

작은놈이 투덜대는 소리에 잠시 미소가 지어진다.

“그것이 궁금하니, 알려줄까?”

“아빠는 아세요? 뭐예요? 알려주세요.” 류성룡 집안은 명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종손 9대가 내리 벼슬을 한 명문가다. 이는 집안에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은 덕분이었다. 서애가 지은 <서애교자훈>에 그의 자녀 교육관이 나타나는데 “비록 세상이 어지럽고 위태로워도 공부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독서 기법도 제시했다. <서애문집>에 “독서란 생각이 중심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 읽어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다섯 수레의 책을 줄줄 외우지만 글의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아하~ 생각을 하면서 책을 많이 읽으라는 거구나! 어휴, 그런데 그게 어디 쉽냐고요.”

그렇다.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간단하고 쉽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는 그 쉬운 이치를 정작 실천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마을 앞쪽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멋들어지게 깎아지른 부용대,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울창한 노송 숲이 절경을 이루는 하회마을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서애 류성룡이 유생을 교육하던 병산서원을 둘러본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하회마을 풍경은 조용히 삶의 근본을 일깨우는 곳이다.


글·사진 이동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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