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중 멋진 사람이 많다. 고매한 학식을 자랑하는 선비가 있고, 붉은 옷에 백마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전설 같은 인물도 있다. 의병의 고장 경남 의령으로 홍의장군을 만나러 가보자.

글·사진 이동미(여행작가)


정암나루를 한 번에 보던 정암루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이 계속되다 보면 가끔씩 지루할 때가 있다. 그런 때 아이들이 던져주는 한마디가 웃음을 주고 신선한 청량제가 된다.

“엄마! 저는 커서 장군이 될래요.”

“장군? 좋지! 너는 어떤 장군이 되고 싶은데?”

“홍길동 장군!”

“엉? 홍길동 장군?”

“그래! 홍길동 장군! 임진왜란 때 백마 타고 빨간 옷 입고 나타나면 왜군이 무서워서 벌벌 떨었대. 나는 그렇게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홍의장군 곽재우
홍길동 장군과 홍의장군 찾아가기
홍길동과 홍의장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경남 의령으로 향한다. 장군이 되겠다는 아들놈이니 뱃살을 줄일 겸 ‘의병길’을 걸으니 잘 왔다며 홍의장군이 반긴다. 의령 입구에 있는 17m 높이의 홍의장군 동상은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 백마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며 호령하는 웅장한 기상을 담고 있다. 아들이 환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홍의장군 이야기를 해달라 조른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년)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사람은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육지의 의병인데, 이 의병 가운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이는 곽재우 장군’이라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우와~ 멋지다. 그런데 의병은 어떻게 일으켜요? 모여라 하면 사람들이 모이나요?”

곽재우의 집안은 원래 현풍에 살았지만, 곽재우는 외가인 의령군 유곡면에서 태어났다. 34세가 되던 선조 18년 과거에 급제했지만, 지은 글 중 임금의 뜻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다 하여 ‘무효’가 됐다. 이 일로 곽재우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농사와 낚시를 하며 지냈다. 그러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9일째 되던 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조상의 산소에 절을 올리고 유곡면 세간리의 커다란 느티나무(懸鼓樹)에 북을 매달고 이를 두드려 의병을 모았다. 처음에 그를 따르던 사람은 집안의 종 10여 명에 불과했다. 5월 4일, 곽 장군과 의병 10명은 남강에서 왜병 척후선 3척을 불태웠다. 이틀 뒤에는 13명으로 왜군의 배 13척을 물속에 가라앉혔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산속에 숨어 있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곽재우는 재산을 털어 무예 있는 사람을 모으고, 집을 군사들에게 내주고 처자의 의복까지 거두어 의병의 처자에게 나누어주었다.

“아휴~ 어렵다. 의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그런데 곽재우 장군은 싸움도 잘했어요? 멋지게?”
곽재우 장군은 자신을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붉은 옷을 입고 혼자서 말을 타고 돌진해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하고, 적이 바라볼 수 있는 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게 해 상대가 엄청나게 많은 줄 알고 도망치게 했다. 또 적을 위험한 곳으로 꾀어 들이고,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적을 무찌르는 등 신출귀몰한 전법을 구사하기에 왜군은 붉은색만 봐도 벌벌 떨었다.

장군의 활약으로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으로 왜군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고, 총포와 화약 등 왜군의 군수품 수송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남강 물길 위의 솥바위
왜군에게 일침을 가한 ‘정암진 전투’
“자~! 여기가 그 유명한 솥바위, 정암진 전투의 현장이란다.”

“솥바위요? 저게 솥바위예요? 여기서 싸워 크게 이겼나 봐요?”

곽재우 장군의 가장 빛나는 공적은 정암진 싸움이다. 1592년 5월, 곡창 호남으로 진격하던 왜군이 남강을 건너려 할 때의 일이다. 때마침 비가 온 뒤라 강변은 진흙탕이고 진군하기 어려웠다. 왜군 선발대는 강물이 얕고 바닥이 단단한 곳만 골라 미리 나무를 꽂아 표시해두고 돌아갔는데, 곽 장군은 숨어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어둠이 깔리자 의병을 보내 표지 말뚝을 진흙탕 쪽으로 옮겨 꽂았다. 그런 다음 강변 갈대밭에 활을 잘 쏘는 궁수들을 숨겨놓았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아무것도 모르는 왜군은 표시만 보고 건너다가 진흙탕에 들어섰다. 그 순간, 정암나루 옆 벼랑 위에 홍의장군이 흰 말을 타고 나타나 칼을 빼 들었다. 당황한 왜군이 달아나려 했지만 진흙탕에 빠져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 갈대밭과 바위틈에서 함성과 북 소리가 터지면서 화살이 날아들었고, 왜군 수백 명은 한순간에 고꾸라졌다. 양쪽 산마루에서 붉은 옷을 입은 장군 10여 명이 나타남과 동시에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으니 살아남은 왜군이 거의 없었다 한다.

“그런데 성묵아! 홍의장군은 왜 빨간 옷을 입었을까? 눈에 잘 띄어 위험할 텐데 말이야.”

“글쎄요? 빨간색이 피처럼 보이니까 무섭게 하려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년)이 지은 조선 시대 야사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곽재우는 자신을 ‘천강홍의장군’이라 칭하며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장군(하늘이 낸 장군)으로, 홍의는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으로 만든 것이라 했다 한다. 즉 신격화, 차별화한 것이다. 또 하나, 임진왜란 당시 왜의 조총 사정거리는 50~100m인데 장군은 눈에 잘 띄는 붉은 옷을 입고 농민을 자기 뒤에 세워 조총 사정거리에 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유가 어떠하든 곽재우 장군의 붉은 옷은 아군에게 사기를 북돋우고 적군에게는 붉은색만 봐도 벌벌 떨게 했는데, 날쌘 장수들을 뽑아 자기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게 해 왜군의 정신을 빼놓는 기발함도 보여주었다.

 

곽재우 장군 부인이 싸준 사랑의 망개떡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의령천 강줄기를 따라 충익사에 이르렀다.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17장령, 무 명의병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의병탑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충의각이 눈에 띈다.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의 증직명과 관향을 적은 명판을 모신 목조건물로, 극락세계를 염원하는 상여 모양이다.

“어, 아빠! 이거 보세요. 굉장히 신기해요!”

전관 안에는 백마를 타고 붉은 옷을 입은 홍의장군의 기마상 그림이 있다. 화살표를 따라 걸으며 그림을 보면 홍의장군이 계속 눈을 맞추며 자신을 보는 듯 따라온다. 이를 다시점(多視點) 화법이라 하는데, 아들 녀석은 신기한지 여러 번 같은 동선을 반복한다.

어느덧 의령천에 저녁놀이 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희고 꽁지가 예쁜 물새 한 마리가 강가로 날아든다. 멀리 의령 구름다리가 보이고, 강물 소리는 맑고 시원하다. 등에 진 배낭에서 망개떡을 꺼내 먹는다. 망개떡은 팥앙금을 넣은 찹쌀떡을 망개나무 잎에 싼 것이다. 쫄깃쫄깃 달콤하다.

청미래덩굴을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라 부르는데, 이는 곽재우 장군의 아내가 출병하는 남편에게 싸 준 떡이라 한다. 망개 잎의 방부제 성분으로 떡이 잘 쉬지 않고 떡에 먼지나 흙이 묻는 것도 막는 효과가 있었으니 과연 곽재우 장군은 용감하고 의로웠으며, 그 아내는 지혜로웠다. 

곽재우 장군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지만 받지 않았고, 마지못해 부임해도 바로 사양하는 등 벼슬을 거절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 66세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죽은 뒤 임금님이 내린 이름)로 충익(忠翼)을 받았다. 곽재우 장군이 신출귀몰 활약하며 왜군을 무찌른 이야기를 쓴 소설 <곽재우전>이 전해오는데, 지은 때와 지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Travel Note

█의령 의병길 정암루와 솥바위 → 의령천 따라 걷기 → 의령 구름다리 → 충익사 약 5km 구간으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이런저런 이야기와 구경을 곁들이면 반나절 코스가 된다.

█곽재우 장군 생가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형태로 꾸며졌으며, 마을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493호 ‘의령 세간리 현고수’가 있다.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로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인데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했다고 한다.

█맛집 의령에는 쇠고기국밥이 유명하다. 그중 종로식당(055-573-0303)은 역대 대통령이 의령에 들르면 꼭 한 번씩 먹고 간다 해서 ‘대통령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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