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악이 울린다. “아빠, 임금님이에요! 저기 임금님이 보여요!” 묘정3각(卯正三刻, 6시 45분경) 세 번째 북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임금님은 창덕궁(昌德宮)을 떠나셨다. 융복(戎服)을 입고 모자에 깃을 꽂고 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돈화문(敦化門)에서 출발했으니 수행하는 사람이 1천779명, 말은 779필로 실제 동원된 인원은 6천여 명에 달한다. 어머님과 누이를 모시고 63리 길을 달려온 임금님, 그 임금님의 화려하고 웅장한 행차가 모퉁이를 돌아선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정조, 이름도 아름다운 임금님
1795년 을묘년(乙卯年)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대왕이 어머니(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화성(水原華城)에 들른 뒤 현륭원(顯隆園)으로 원행(園幸)을 했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지는 수원화성문화제(水原華城文化祭), 당시 상황을 기록해놓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바탕으로 재현해보는 ‘정조대왕능행차’가 만석공원에서 시작해 장안문, 종로사거리, 팔달문에 이르렀다.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가 앞서고 말 120필과 신하, 호위무사, 병졸 등 2천여 명이 뒤따르니 붉고 푸른 정조대왕능행차연시는 정말로 볼 만하다.

아이들에게 조선 역사상 가장 멋있는 임금이 누구냐 물으면 십중팔구 ‘세종대왕’이라 답한다. 필자는 ‘정조대왕’이 아닐까싶다. 젊음을, 개혁을, 뜻을 곧게 세우고 종전 세력과 과감히 맞서던 젊은 임금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실제 정조대왕의 행차는 아니지만, 아이들만큼 가슴이 뛰는 건 그 때문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야심찬 작품이다. 1794년 1월 착공해 1796년 9월 10일 완공했으니 수원화성의 근간에는 효심이 깔려 있다. 아버지 묘소 현륭원에 자주 가려면 행궁이 있어야 했고, 더 나아가 한양에 있는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가진 집권 세력을 견제하며 자신만의 정치적 꿈을 펼칠 새로운 수도 건설이 필요했다. 성곽의 길이는 5.52km, 4대문을 내고 암문, 수문, 포루, 각루 등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 있게 배치했다. 거중기(擧重機) 등 당대 최고의 건축 기술과 과학기술이 총동원되었으니 조선 시대 성곽 중 가장 과학적이고 치밀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하다.

“아빠, 성 쌓는데 도대체 어떤 기계를 사용했다는 거예요?”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기구를 만들었지. 중국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이라는 책을 연구해 정약용 선생이 만든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것인데, 작은 힘으로 600배나 큰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지. 유형거(遊衡車)라는 것도 있는데 종전 수레보다 바퀴를 작게 만들고, 반원 모양 복토를 안에 덧대 비탈길에서도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도록 했어. 360˚회전하고 종전 수레보다 두 배나 빠르게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단다.”

“우와~ 정약용 선생님은 천재네요, 천재!”

 

백성을 사랑한 최고의 임금
“근데 엄마는 왜 정조 임금님을 그렇게 좋아해요?”

“정조 임금은 정말로 백성을 사랑하고, 자기의 의지를 굳건히 밀고 나가셨지.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이야.”

“백성을 사랑하셨는지 어떻게 알아요?”

“수원화성을 완성한 뒤 공사 보고서 같은 책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을 만들었단다. 이 책에 수원화성 공사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지. 당시 나라에서 백성에게 일 시키는 것을 ‘부역’이라 하는데 강제 동원되는 거라 돈을 주지는 않았어. 그런데 화성 공사의 기록을 보면 ‘개성부의 석수 임 작은놈(林者斤老味)은 부석소와 남암문에서 577일 반 동안 일했다’며 반일 치까지 계산해 인건비를 지급했단다. 일하다 다친 사람은 팔달산 서쪽 임시 병원에 입원시키고 일당의 50%를 주었고, 여름에는 더위에 힘들까 봐 ‘척서단(滌署丹)’이라는 약을, 겨울에는 추위를 막는 털모자를 내려주었단다.”

이뿐만 아니다. 수원화성은 화서문, 장안문, 북수문인 화홍문 등을 일직선으로 하여 총 길이 4.2km로 설계되었다. 팔달산 꼭대기에 올라 성문과 시설물이 들어설 자리를 확인하던 정조는 백성의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저 백성은 예전 고을에서 살다 옮겨온 사람들인데 또 이사를 가야 한다면 백성을 위해 성을 쌓고자 하는 나의 본뜻과 다르다.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집 밖으로 성문을 쌓으라’고 명해 구불구불한 형태가 되면서 현재의 길이로 늘어났다.

“와~ 정말 멋진 임금님이네. 나도 이제부터 정조 임금님을 좋아해야지.” 정조는 낙남헌(落南軒) 뜰에서 문무 과거 시험을 실시하고, 새로운 화약 무기를 실험했으며,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 군사들의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을 지휘하며 나름의 꿈을 키웠다.

 

정조 임금이 잠드신 곳 ‘융건릉’
“자! 우리 이번엔 융건릉에 가볼까?”

“융건릉이 어디예요? 이름을 들으니 무슨 무덤 같은데요.”

“맞아, 융건릉은 정조 임금하고 정조 임금의 아버지가 잠드신 곳이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자락에 자리한 융건릉은 단아하다. 융릉(隆陵)은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 장조(莊祖, 1735~1762)와 비(헌경황후, 1735~1815)의 합장릉이다. 장조는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나 2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부왕을 대신해 정무를 돌볼 정도로 영특했다. 하지만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뒤주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28세에 비참하게 죽은 아들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뜻이니 우리가 익히 아는 사도세자가 바로 장조다. 

원래 사도세자의 능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한 삶을 보낸 아버지를 가슴 아파하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정조 13)에 풍수지리적으로 좋다는 수원(현재의 화성) 화산으로 옮긴 후 현륭원(나중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했다. 같은 격의 어느 원보다 훌륭히 꾸며 병풍석을 돌리고 혼유석과 팔각 장명등, 문무인석을 세웠으며 융릉에만 소나무 45만 그루를 심었다. 정조는 아버지 무덤 앞에서 소매가 젖도록 울고, 재실에 들어가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조 임금님이 송충이 먹은 얘기 아니?”

“웩! 송충이를요? 임금님이? 왜요?”

“정조 임금은 효심이 지극하셨지. 그런데 어느 해인가 송충이가 늘어나 소나무를 갉아 먹는 거야. 화가 난 정조 임금은 송충이를 손으로 잡아뗀 후 ‘네가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아버님의 묘소에 정성들여 가꿔놓은 나무를 갉아 먹어서야 되겠느냐!’고 호통을 쳤대. 그리고 송충이를 입에 넣고 씹었지. 순간! 소나무에 붙어 있던 송충이들이 일제히 땅으로 떨어져 죽었고, 그 뒤 송충이가 생겨나지 않았다는구나.”

“에이~ 거짓말, 어떻게 송충이가 한꺼번에 떨어져요.”

소라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아니야, 맞을 수도 있어, ‘임금님’이잖아!” 성묵이의 대답이다.

소나무 껍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 아이들이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먹었다. 어린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기면 그 나무는 죽는 것이 당연한데, 융건릉의 소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안 정조는 어린이들을 벌주는 대신 콩을 볶아 헝겊 주머니에 넣은 뒤 소나무에 매달았다고 한다. 소나무 껍질 대신 콩 볶은 것을 먹으며 놀라는 자상한 뜻이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나란히 누운 ‘융건릉’
정조는 생전에 ‘선친의 묘 곁에 자신의 묘를 써달라’ 유언했고, 그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정조 임금의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으로 모양이 거의 같다. 능에는 상석과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고 난간석이 없는 대신 건릉에는 난간석이 있으나 병풍석이 없다. 모두 서향이라 해질 녘의 능 분위기가 그윽하고, 눈이 오면 또 다른 별천지를 보여주니 눈 내린 경치를 ‘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 하여 화성팔경 중 제1경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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