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차였다. 서해를 바라보면서 걷는 해변길, 그 짧은 문장에는 산행이나 도심 산책과는 다른 낭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람들로 북적대는 단풍 명소 대신 태안해변의 노을길로 향했다. 송림과 해안가를 번갈아 걷노라니 어느새 바다는 주홍빛 물결. 붉은 단풍이 곱게 내려앉았다.취재·사진 박지현 리포터 true100@empal.com

 

 

13:00 백사장항  범게,
순직하다
바닷가 산책로인 노을길은 안면도 백사장항에서 시작해 꽃지해변에서 끝난다. 무려 3시간 30분의 대장정이다. 수행하듯 걷겠다는 열혈 가족이 아니라면 선뜻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차량 이동도 불편하다.

외지인은 출발 지점에 차를 세워두고 해변길을 걷다가 종착지에서 콜택시를 불러 이동해야 한다(택시비만 2만 원 남짓이다). 이래저래 부담 백배(?)인 걷기 여행이 될 수 있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송림과 사구, 해안가가 오묘하게 이어진 핵심 구간, 그러니까 삼봉해변에서 기지포해변까지 산책하고 나머지 구간은 자동차로 이동하는 거다. 정석은 아니지만 해변길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노을길의 첫 번째 코스는 꽃게로 유명한 백사장항. 항구는 생기가 가득했다. 때마침 밀물이 들어오면서 꽃게 잡이 어선들이 항구에 속속 들어섰고, 곳곳에는 갓 잡아 올린 그물에서 꽃게를 떼는 아낙네들의 작업이 한창이었다. 순간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어떤 패션족은 지미추를 신으면서 영혼을 팔았다는데, 우리 가족은 꽃게탕 앞에서 정신줄을 놓았다. 자칭 꽃게 마니아, 우리는 슬그머니 ‘청영호’라는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다가갔다. 아주머니 두 분이 꽃게 떼기 작업에 한창이
 
었다.

“아이구, 꽃게는 잡는 것보다 떼는 게 일이지. 그물 하나가 3만 원이나 하니까 막 잡아떼면 큰일이거든. 사실 배우는 중이유. (옆을 가리키며) 이 아줌마가 선주인데 얼마나 빨리 게를 떼는지 몰라. 그러니까 학원에 다니는 셈이지.”

몸체도, 말투도 넉넉한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꽃게 떼기는 꼬챙이 하나로 하는 100% 수작업이다. 바구니에는 대여섯 마리가 담겨 있었는데, 꽃게와는 그 모양새가 닮은 듯 달랐다. 사촌격인 ‘범게’다. 아주머니는 꽃게 그물에 덩달아 잡힌 놈들이라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사가슈, 싸게 줄 테니!”

우리가 낯선 범게를 노려보면서 망설이자 아줌마의 상세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 주민은 맛이 좋아서 범게만 먹는다, 꽃게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다. 마음이 반쯤 넘어가는데 갑자기 결정타가 날아왔다. 선주 아주머니가 갑자기 범게의 배딱지를 쩍 갈라 보인 거다.

“봐요, 얼마나 속살이 꽉 찼는지!”

오 마이 갓! 우리 가족의 의심 세례에 범게 한 마리가 즉사한 순간이었다(정말이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순직한 범게 덕분에 선주 아주머니와 우리의 거래는 순식간에 물살을 탔다.

넉넉하게 먹자는 생각에 2만 원어치를 구입했더니 무려 범게 25마리가 얼음과 함께 포장 박스에 담겼다. 가오리 세 마리는, 덤.

 

15:00 삼봉해변  숲과 바다,
그 사이를 걷다

 
본격적으로 노을길 산책에 나설 때. 백사장항에서 조금 떨어진 삼봉해변에 자동차를 주차하자 ‘해변길’ 이정표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노을길의 명소로 알려진 송림길이다. 사방은 온통 소나무, 바닥에는 솔방울 투성이다. 시끌벅적하던 백사장항의 추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우리를 감싸는 것은 소나무와 바람, 흙이었다. 하늘로 뻗은 소나무들은 나뭇가지로 서로 간질이듯 빽빽하게 들어섰고, 그 사이를 오후의 햇빛이 비집고 들어와 바닥에 쏟아졌다.

노을길 여행을 준비하면서 몇몇 블로거의 여행 사진을 검색했다(편도 3시간의 여행이니 그 가치를 저울질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모니터 안의 송림길은 그저 ‘괜찮은’ 수준. 그런데 막상 도착한 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누군가 사람은 사진보다 실물이 못 하고, 자연은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고 했다. 송림을 걸으면서 새삼 그 얘기에 고개를 끄떡였다. 

송림길이 끝나자 본격적인 해변길이 시작됐다. 이제 바다와 해안사구를 감상하면서 산책을 즐길 차례였다. 이곳부터는 유모차를 끌기가 훨씬 수월했다. 삼봉에서 기지포까지 폭 2m의 나무 데크가 조성된 덕분이다. 일명 천사길. 구간 거리도 1천4m로 맞췄다. 간지러운 이름에 담긴 사연은 이랬다. 리아스식 해변에 조성된 산책로는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걷기에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천사길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부담 없이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특별 구간. 실제로 이 길을 거닐면서 휠체어에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가족을 보고 가슴이 울컥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천사길은 해안사구의 보고다. 바닷가에는 해안사구가 넓게 펼쳐져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의 해안사구 해설 프로그램에 낄 수 있었다. 모래언덕에서 살아가는 갯그령과 갯쇠보리, 통보리사초 등 낯선 식물에 대한 얘기다.

“이런 식물이 모래언덕이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거죠. 뿌리를 넓게 뻗으면서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거든요. 반면 외래종은 자리만 차지하고 뿌리가 깊지 못해요. 토종 식물이 살아갈 터전만 뺏으니까 정기적으로 제거 작업을 하죠.”

해설자는 외래종을 뽑아서 눈앞에 보여줬다. 한국전쟁 때 미국 군화에 박혀 한국에서 발화, 백령도에서 처음 발견됐다는 백령풀이다. 겉으로는 무미건조할 듯한 모래언덕에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셈이다. 우리는 여유롭게 송림과 해안가를 2시간 남짓 산책했다. 어느새 바다는 은빛에서 주홍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17:00 꽃지해변  갈매기에
 휩싸여 해넘이를 보다
우리는 해넘이를 감상하기 위해 노을길의 종착지인 꽃지해변으로 15분 남짓 차를 몰았다. 사실 해넘이 구경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해넘이를 감상하고 서해안고속도로에 오르면 정체 구간에 묶일 게 뻔했다. 우리는 해넘이의 즐거움과 교통 체증의 고통을 저울질해야 했다. 다행히 엄마가 선포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그냥 가기에는 너무 서운하지 않니? 아예 밤에 도착한다는 심정으로 여유를 가지자고. 어때?”

하기야 서해의 진짜 빛깔은 오후부터 시작된다. 뜨거운 햇볕이 바다에 스미면서 시시각각 하늘과 바다 빛깔이 바뀌는데, 그 풍경은 언제 봐도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꽃지해변을 명소로 꼽는 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다소 심심한) 해넘이가 아니라, 할미·할아비바위와 어우러진 일몰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또 다른 해넘이 구경꾼까지 가세해 있었다.

“갈매기들이 참 많네. 저 새는 마치 일몰을 구경하는 것 같아.”

사람들만 해넘이를 즐긴다는 건 순전히 우리의 착각이었다. 갈매기 몇 마리가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 거다. 우리 가족은 해넘이 구경의 동무가 되어준 갈매기에게 뭔가 보답을 하려고 가방 에서 먹다 남은 식빵을 꺼냈다. 그러자 조용하던 해변은 갑자기 몰려든 새들의 날갯짓으로 시끄러워졌고, 우리는 본의 아니게 갈매기들에게 휩싸여 해넘이를 감상해야 했다. 그 사이 일몰은 가속페달을 밟은 자동차마냥 바다를 향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꽃지해변은 그야말로 금빛 세상, 노을길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종착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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