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참으로 좋다. 눈부신 햇살을 걸러 투명하게 보이는 잎사귀는 황홀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가을 여행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여행길에 아이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인생의 지침 하나 새겨주면 어떨까?글ㆍ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엄마! 이이 알아요? 이름이 되게 웃기죠? 이이가 뭐야, 이이가.”

아들 성묵이가 뚱딴지처럼 말을 붙인다.

“성묵아, 율곡 이이 선생님을 말하는 거지?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조선 시대에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학식도 아주 높은 분이야. 그리고 존경하는 분의 함자를 마구 말하면 안 돼. 호를 부르는 거야. 율곡, 이율곡 선생님이라고.” “이율곡? 그 이름은 들어봤는데…. 같은 사람이에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웃음보따리를 던져주는 아들 녀석은 집안의 감초 같은 존재다.

“알아요, 강릉 오죽헌에 갔잖아요. 5천 원짜리에 계신 분.”

“맞아, 우리 율곡 선생님 뵈러 갈까?”

“정말요? 강릉 가는 거예요? 야호~ 신난다. 바다도 보고 회도 먹고. 랄라랄라.”

 “강릉에 안 갈 건데?” “엥? 그럼 어디로 가요?”

 

율곡을 만나러
오죽헌으로? No!

 
자유로를 달린다. 파주로 들어서니 임진강 줄기가 친구 하자 따라온다. 잠시 눈요기를 즐기다 내륙으로 들어서 자운서원에 도착한다.

“어?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에 율곡 선생님이 계세요?”

그렇다고 대답하니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운서원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자운서원에 들어서니 강인당 양쪽으로 36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오랜 역사를 대변하듯 위엄 있게 서 있다. 강인당 뒤쪽에는 율곡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문성사가 있는데,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 선생의 위패도 함께 모셔졌다. 율곡 선생의 영정을 보고 아이들이 ‘아하~ 율곡 선생의 영정 때문에 이곳에 왔구나’라며 지레짐작을 한다. 다시 알 듯 모를 듯 미소로 답한다.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대표 학자로, 어머니는 익히 아는 신사임당이며 중종 31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빠, 그런데 율곡이라는 호는 무슨 뜻이에요?”

옛날 사람들이 호를 지을 때는 특별한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거주하는 동네 이름으로 짓기도 했다. 율곡 이이는 선대부터 살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했는데, 밤나무골(栗谷)에 살았기 때문에 호를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에이, 난 또…좀 싱겁네~”

 

‘진짜 율곡’을 만나다
“애들아, 율곡 선생님을 뵈러 강릉에 가지 않고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이곳 때문이란다.”

율곡선생유적지 안쪽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 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등 가족묘 14기가 있다.

“율곡 선생님뿐만 아니라 신사임당의 묘도 여기 있어요? 우와! 대박이다, 대박! 여기에 ‘진짜 율곡’ 선생님이 계시네! 저는 당연히 강릉에 계신 줄 알았죠.”

율곡 선생의 묘로 올라가는 길은 하늘을 바라보며 올라간다. 제법 가파른데다 양옆으로 송림이 있고, 가운데 능선을 따라 묘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4단 형식인데 맨 위에 율곡 선생 묘가 있고, 그 아래로 맏형 부부의 묘, 신사임당과 이원수의 합장묘인 부모님 묘, 가장 아래쪽에 맏아들의 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묘가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아버지 이원수의 묘보다 높은 맨 위쪽에 자리하니 역장(逆葬)의 모습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한 경우 이처럼 묘를 쓰던 당시의 풍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는 안내판과 해설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처럼 일가족의 묘가 같은 지역에 있는 것은 고려 말부터 행해져 조선 시대에 일반화되었다. 부모의 묘 아래 자식의 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 중기와 후기 이후라고 한다. 아들딸 구별 없이 부모를 모시던 조선 전기의 풍습에 따라 신사임당이 외가인 강릉에 20년 넘게 머물며 율곡을 낳은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는 손자를 감싸 안은 부모님과 형님을 율곡 선생이 감싸고 있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율곡 선생 묘소 앞에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있고, 부인 곡산 노씨의 묘는 이이의 묘보다 조금 위쪽에 전후 합장묘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자신을 세우는 글 ‘자경문’
“율곡 선생님은 돈에 그려지고 이름도 아주 많이 들어봤는데, 얼마나 위대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긴 하다. 가끔씩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듣거나 거론하며 다 아는 듯 행동하지만, 사실 드렇지 않은 때도 있음에 슬며시 웃어본다. 아이들은 참 솔직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율곡 이이는 덕수(德水) 이씨 이원수(李元秀) 공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4남3녀 중 셋째 아들이다. 명종 13년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 이후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기도 했다. 29세에 호조좌랑으로 임명된 뒤 황해감사,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임진왜란을 예견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며, 대동법의 실시와 사회제도 개혁에 노력했다. 학문에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닌 구체적인 시책으로 여겨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했다. 선생의 저서로는 <성리설>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있다.

“우와 ~ 대단하다. 율곡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어요? 신기하네.” “그 비결을 알려줄까?”

“뭔데요? 아빠는 아세요?” “그건 바로 ‘자경문’ 덕분이란다.”

자경문(自警文). 이것이 무엇일까? 율곡은 16세에 정신적 지주이자 학문적인 스승이며, 자애로운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는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으로 삼년상(三年喪)을 마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금강산에서 1년을 지낸 뒤 오죽헌으로 돌아온 율곡은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다시 공부에 열중하면서 앞날을 설계한다. 이때 율곡이 만든 것이 ‘자경문’인데, 자신을 위한 인생의 지침서 같은 것이다.

“아빠, 어떤 내용이에요? 궁금해요.”

“모두 11가지 조항인데 좀 길단다. 집에 가서 원문을 찾아줄게. 간단히 요약하면 ‘뜻을 크게 가지자, 말을 적게 하자, 마음을 안정시키자, 혼자 있을 때를 삼가고 게으름을 이기자, 책을 읽자, 욕심을 버리자, 일할 때는 성심을 다하자, 정의로운 마음을 갖자, 반성하는 마음을 갖자. 밤이 아니면 눕지 말자. 열하나,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자’는 내용이지.”

“아하~ 이렇게 정해놓고 스스로 잘 지키다 보니 저절로 훌륭한 사람이 된 거구나!”

“그렇지! 우리 소라랑 성묵이도 자경문을 하나씩 만들어볼까?”

 

 
자색 노을 가득한 임진강변
가을볕이 완연한 잔디밭을 거닐다 율곡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서 임진강가의 화석정(花石亭)을 찾았다.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정자로, 율곡이 시간 날 때마다 들러 학문을 닦고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제자들과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강에 떠 있는 황포돛배를 보러 가며 차 안에서 딸아이가 묻는다.

“그런데 엄마, 자운서원의 자운은 무슨 뜻이에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던 율곡 선생이 돌아가시자 온 백성이 울었는데, 장례를 치르는 날 하늘 가득 자줏빛 구름이 뒤덮였대. 자줏빛 자(紫)에 구름 운(雲)을 써서 자운서원이지.”

황포돛배가 서 있는 임진강변에 저녁놀이 들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강과 하늘이 율곡 선생의 장례일처럼 자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가면 온 가족이 모여앉아 각자 자경문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한다. 또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받아들여졌다면 팔년 뒤의 임진왜란은 어떻게 되었을지, ‘만언봉사’ ‘시무육조’ 같은 상소가 모두 받아들여졌다면 어찌 되었을지, 49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율곡이 퇴계 이황처럼 70세까지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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