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게, 우리 아이들에게‘나라’란 무엇일까?‘대한민국’이란 또 무엇일까? 삼일절, 광복절 등 매년 지나는 국경일은 예전보다 무게감이 줄어들고 국제화, 세계화되면서‘국가’라는 개념 또한 희석되는 요즘‘조국’‘독립’같은 단어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와~ 이 집 굉장히 크고 좋다! 엄마 아빠, 우리 여기에 왜 온 거예요?”

“성묵아! 고택 스테이 하러 왔다고 아까 아빠가 그러셨잖아.” “그랬나? 고택 스테이가 뭐였지?”

기왓골이 예쁜 임청각(臨淸閣, 보물 182호)에 발을 들이며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사찰에서 하룻밤 묵으며 사찰 문화를 경험해보는 템플 스테이(temple stay)처럼 고택 스테이는 고택(故宅) 혹은 종택((宗宅)과 스테이(stay)가 합해진 말로, 수백년을 이어온 명문가를 방문해 하룻밤을 자고 생활하며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통해 잊고 지내던 소중한 것을 되새겨보는 숙박 체험이다.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들어가던 임청각
임청각은 낙동강 가에 길게 자리하고 있다. 대문이 낙동강과 붙어 있어 강릉의 선교장처럼 배를 타고 들어갔다 한다. 대문이 누대로 지어져 2층에 앉아 낚시를 했다니 가히 선비의 풍류가 넘치는 집이었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登東而舒嘯臨淸流而賦詩(동쪽 언덕에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읊조린다)’에서 취한 것이니 집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아이들은 아파트에 사는지라 이곳저곳 집 구경이 바쁘다. 곡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지붕의 암키와 수키와에 눈길을 주고, 나무를 이리저리 깎아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추어 집을 짓는다는 말에도 호기심을 보인다. 여자들이 살던 안채와 남자들이 살던 사랑채가 구분되어 다소 놀라는 눈치다.

앞은 낮고 뒤가 높은 구조로 2m쯤 되는 기단이 남녀별, 계층별 위계질서 구분과 더불어 채광 효과를 높이며, 건물 사이의 크고 작은 마당은 공간의 활용도를 높인다.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아들놈이 어딘가의 문을 열어보더니 누나를 급하게 부른다. “누나, 누나! 여기 좀 봐. 엄청 신기해!”

헛간이나 행랑채쯤으로 사용했을 법한 건물의 나무 문짝을 삐꺼덕 열어젖히니 현대식 세면실이 나온 것이다. 옛날 화장실을 불편해하는 현대인을 위해 수세식 화장실과 세면장을 들였지만, 옛 건물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해 밖에서 보면 예측하기 힘든 깜짝 변신(?)이다.


재상 세 명이 나온다는 임청각의 우물방
이곳 임청각을 지은 이는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다. 상고사의 귀중한 자료인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저술한 고려 말 행촌 이암(李癌)의 손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이고, 이원의 여섯째 아들로 영산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이 이곳 풍광에 매료되어 입향조가 되었으며, 이증의 3남 이명이 중종 10년 (1515)에 임청각을 지었다.

“어? 저건 뭐예요?”

임청각을 구경하다 보니 현수막이 하나 보인다. ‘임청각이 낳은 독립운동가’라 쓰여 있고, 가계도와 함께 아홉 분의 이름과 사진이 있다. 이중 두 분은 사진이 없다.
“어~ 저거!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란다.”

그렇다. 이 곳 임청각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해 그 아우 이상동, 이봉희 삼형제와 자녀들인 이준형,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석주의 손자 이병화 등 한집안에서 독립운동으로 아홉 명이 건국훈장을 받았고, 처가까지 합치면 47명이 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다.

“와~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이들이 감탄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앞쪽 방으로 간다. 임청각 안내책자에 산청(産廳)으로 소개되었는데, ‘정승 셋을 낸다’는 방으로 진응수가 나는 영천(靈泉)이 앞에 있어 우물방이라고도 한다.이 방에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이 태어났다.


명문가 종손에서 독립운동가로
이상룡 선생은 안동 전통 유림의 명문가인 고성 이씨의 종손으로 태어나, 비교적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청년기의 이상룡은 혼란스러워진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등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에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까지 발표되자 전통과 예절을 지키고 조상의 뜻을 받들며 지켜가던 조국을 지키지 못함에 분노를 느낀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능력을 갖춰야 하기에 계몽운동을 하고, 의병 활동을 했지만 현실은 힘겹기만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1910년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말았다. 석주 이석룡은 조국을 지키지 못한 울분을 삭이며 지도를 펴놓고 고심하다 고구려의 옛 영토인 만주 땅에서 재기할 것을 결심한다.

선산을 찾아 절을 올리고 가산을 처분해 만주 독립운동 자금으로 준비한 뒤, 노비문서를 불살랐다.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52세의 나이에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망명 길에 오른다. 안동~추풍령~서울~신의주~단동~환인현 횡도천~유하현 삼원포에 이르는 2천500리의 망명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조국 산천을 뒤로한 채 살을 에는 북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만하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이미 내 집과 토지 다 빼앗고/ 내 처자도 넘보는데/ 이 머리 잘릴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

국경을 넘으며 지은 석주의 거국시(去國詩)다.

우당 이회영과 함께 서간도에 신흥무신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키웠냈다. 석주 선생은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만석 재산을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임청각까지 팔기를 세 번이나 했으니 매번 고성 이씨 문중에서 다시 사들였다한 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고 군사 기구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며 무장 항일 투쟁의 선봉에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희망 하나로 만주 생활을 버텼다.


조상의 위패가 없는 임청각의 사당
임청각의 우측에는 사랑채며 정자인 군자정이 위치한다. 화려한 누마루에 맞배지붕이 단아한 군자정에는 이 집의 당호 ‘臨淸閣’ 현판이 있는데,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군자정 옆쪽 언덕 위에는 사당(祠堂)이 있다.

“엄마, 사당이 뭐예요? ”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이지. 사당에는 삼년상을 마친 신주를 모시는데, 원래 4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야 하지만 고성 이씨의 종택 임청각의 사당에는 조상의 위패가 없단다.” “왜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과 임청각을 떠날 때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위패를 전부 장주(葬主: 땅에 묻어 장사 지냄) 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멋진 집을 두고 떠나는 심정이 어땠을까?”

이 집은 원래 99칸이었다. 임청각 앞으로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나 합수머리를 이루고 백두대간 줄기인 영암산이 집 뒤를 받치니 배산임수 자리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귀래정, 영호루와 함께 임청각을 고을 안 최고 명승지라 했다. 집을 지을 때 음행오행설이나 풍수지리에 따라 문자형 구조로 지었는데 임청각은 일(日)자, 월(月)자 혹은 합쳐진 용(用)자 형으로 지었으니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킨다는 의미다.

하지만 임청각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중앙선이 놓이며 대문간과 행랑채가 헐려나가 일자와 월자 구조가 틀어졌고, 배를 타고 도착하던 입구에는 흉물스런 철로가 놓여 밤낮으로 요란한 소음과 먼지를 전해준다. 강을 건너면서 바라보던 웅장한 자태도 철다리에 가로막혀 볼 수가 없다. 일제가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일부터 중앙선 철로(1936년 착공, 1942년 개통)를 놓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가 많이 나오는 집이라 하여 아예 없애려는 것을 지역사회가 결사반대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밤이 깊은 시간, 고즈넉한 임청각 안채의 대청마루에 앉아 찐 고구마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석주 선생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1932년 5월 12일 지린성 서란진 소성자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마라’는 유언을 남긴 채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8년 뒤 조국은 독립했고, 일제가 패망하고도 45년이 지난 1990년 10월, 그러니까 석주선생이 임청각을 떠난 지 79년 만에 그의 유해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현재 국립 대전 현충원에 모셔졌다.

나라들 되찾은 지 60년이 되어가지만, 일본에 훼손된 임청각은 아직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임진각은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교과서 역할을 한다. 중앙선 열차의 요란함이 또다시 고요한 임청각의 밤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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