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으니 원하는 글씨체로 바꿀 수 있고, 이를 편지로 메일로 혹은 예쁜 카드와 초대장, 신문까지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를 만나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안녕하세요?”

“성묵이 잘 지냈어? 밥 잘 먹고 학교 잘 다니지?”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가람이도 잘 있죠? 대학생이 되니 얼굴 보기 힘드네요. 학교는 재미있대요?”

“요즘 글씨 쓰느라 바빠!”

“???”

대학교 다니는 조카 녀석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글씨’를 쓰느라 바쁘다는 건 무슨 소리일까?

리포트를 쓰느라 바쁘다는 말이다. ‘아하~’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그 뒤에 붙는 설명에 순간 놀랐다. 모든 리포트는 인쇄물 대신 손 글씨로 써서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자료를 긁어다 짜깁기하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정성과 완성도를 본다고. 그러니 악필인 아이들은 ‘죽을 맛’이라며 또박또박 글씨 쓰느라 진땀을 뺀다고 한다. 

 

예산에서 추사 김정희를 만나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악필이다. 필자와 남편도 악필이라 아이들에게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에는 아이들이 글씨를 예쁘게 쓰길 바란다. 문득 ‘추사 김정희’가 떠올라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으로 향해본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만추의 추사고택은 고즈넉하고 아담하다. 이곳에서 정조 10년(1786)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태어났다. 위인의 삶은 과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추사 김정희 역시 그러하다. 어머니 뱃속에서 24개월 만에 나왔고, 김정희가 태어나자 시들어가던 나무가 살아났으며 말라버리던 우물이 다시 솟는 등 생기(生起)가 돌았다는 것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의 사위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네 살에 글을 떼고 여섯 살에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여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가 눈독을 들였다 한다.

“아빠, 우리나라 위인들은 왜 나면서부터 똑똑해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서너 살이면 천자문을 떼는 등 완전 똑똑하고 총명하잖아요. 김 빠져요. 볼품없는 집안에서 난 보통 아이들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건가요?” 순간 멍해진다. 역경을 이기고 위인이 되었다는 서양의 위인전과 달리 우리나라 위인들은 대부분 특출했다는 딸아이 말에 가슴이 찌릿해진다. ‘급수습’이 필요한 순간이다.  
 

고뇌에 찬 10대와 꿈을 키운 20대
“꼭 그렇지는 않아. 위인들도 사람이라 다 똑같아. 추사 김정희도 10대를 아주 불행하게 보냈는걸!” “정말요?”추사 김정희는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가 되었다. 10대 초반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열다섯에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5년 만에 아내의 죽음을 맞았다. 결혼 이듬해에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하늘처럼 믿던 스승 박제가도 세상을 떠났으니, 추사 김정희는 10대에 소중한 사람을 다섯이나 잃는 고통을 맛보았다.

추사 김정희는 스물세 살에 예안 이씨와 재혼하고 스물네 살에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다녀오면서 발전의 시기로 들어선다. 생부 김노경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이 되었는데, 당시 사마시(생원·진사 자격을 주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김정희에게 자제군관의 자격이 있던 것이다. 연경에서 체류 기간은 두 달 남짓. 하지만 이 시간이 김정희의 인생에 커다란 반향을 주었다. 존경하던 학자를 만나고 국제적인 학문과 예술적 교류를 통해 자신의 껍질을 깨고 성숙해졌다.

 

 
중국에서 만난 금석학자 옹방강과 완원
추사는 옛 책을 보며 옛사람들의 필체와 정신을 익혔는데, 마침 연경에서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5~1848)을 만났다. 금석학(金石學)은 문자학(文字學)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필담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글씨와 의견, 질문 등을 보고 옹방강은 추사에게 반해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며 감탄했고, 완원은 완당(阮堂)이라는 애정 어린 아호를 지어주었다. 더불어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류하며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했다.

한양에 돌아온 김정희는 중국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나름의 글씨체를 만들어간다. 자신만의 틀과 형식을 갖추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또 성리학, 천문, 산술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섭렵해갔다. 인품과 학술적 깊이를 갖추어야 진정한 글을 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것은 단지 서예가 아니다!
“엥? 글씨야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쓰면 되는 거지 인품과 학술적 깊이까지 있어야 하나요?”

“옛사람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기준이 뭐였는지 아니?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어.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몸(體貌)·말씨(言辯)·글씨(筆跡)·판단(文理)을 인물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지. 판단력이 가장 우선일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어. 판단보다 글씨가 우선했다는 것이 신기하지? 어떤 사람의 인품과 평정심 같은 것이 모두 글씨로 나타난다고 본 거야.”

이때 갑자기 어떤 비밀 하나를 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현들은 글씨 쓰는 것을 서도(書道)라 했다. 추사가 글씨를 잘 쓰는 위인이란 것이, 추사체를 만든 것이 ‘서도’였음이 깨우쳐졌다. 글씨를 쓴다는 것은 도(道)를 닦는 것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고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제 아이들에게 글씨를 잘 써야 하는 이유를 얘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엄마, 이건 뭐예요?” “음~~ 이거? 추사 선생님이 만든 해시계야!”

“어? 추사 선생님이 이런 것도 하셨어요?”

추사가 글씨만 잘 쓴 것은 아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공자 왈 맹자 왈 글만 읽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생활에 쓰이는 학문을 연구했으니 성리학, 천문, 산술 등에도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추사고택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해 만든 돌기둥이 있다. 이것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했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고,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 판독으로는 ‘무학대사의 비’라 잘못 알려졌던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추사와 추사체를 만든 건 끝없는 노력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외에도 승설도인(勝雪道人)·노과(老果)·천축고(天竺古) 등 생전에 100가지가 넘는 호를 바꿔가며 사용했고, 예당(禮堂)·시암(詩庵)·농장인(農丈人) 등 추사의 호는 503종에 이른다.

“엄마,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알면 알수록 멋진 사람 같아요.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었으니 훌륭한 사람이고, 여러 가지 학문을 두로 익혔으며 글씨 쓰는 것을 도 닦는 것처럼 했으니 말예요. 이를 본받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도 닦듯 글씨를 잘 쓰란 의미로 여기에 온 거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다.

“맞아!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어. 그건 노력! 노력이지.”

때마침 추사기념관의 마지막 코스에 추사 선생이 남긴 명언이 보인다.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갈아 구멍을 냈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내 글씨는 아직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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