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년 한반도의 역사를 되짚어볼 때 어느 시대에 가장 가보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백제 시대가 끌렸다. 역동적이고 글로벌한 움직임을 보이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 그 문화를 엿보고 싶었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중국까지 넘보던 백제, 최대의 위기를 맞다
“엄마, 여기가 무령왕의 능이라고 하셨죠? 무령왕은 어떤 분이에요?”

“멋진 분이지. 정말로 멋진…. 무령왕이 아니었으면 백제는 의자왕까지 가지도 못하고 망해버렸을지 몰라. 쓰러져가는 백제를 다시 일으켰거든.” “그래요? 재미있겠다. 백제 얘기 좀 해주세요.”

백제 이야기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소서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하해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온조는 위례성(지금의 서울)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 온조의 나라가 더 강성해 비류가 죽은 뒤 그 백성을 통합해 백제가 시작되었으니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678년 역사를 자랑한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백제는 13대 근초고왕 때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중국 동진, 일본 등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하지만 광개토왕, 장수왕 등 걸출한 고구려의 왕들이 등장하면서 연전연패하고, 수도 한성까지 함락되고 만다.

“수도가 함락되었으면 어떻게 해요? 이사갔나요?”

“그렇지, 500여 년간 수도로 삼은 위례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단다. 고구려에 쫓겨 한강을 내주고 나니 중국과 교역이 원활치 않아 국제적인 지위가 떨어졌고, 백제의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했지. 한때 평양성과 중국 본토(요서 지방)까지 점령한 백제인데 말이야.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도림에 꾐에 넘어가 국고를 탕진하고 민심을 잃었으며, 아차산성에 갇혔다가 도망치던 중 죽음을 당한단다.”

“어떻게 해요? 큰일 났네요. 왕이 죽었으니….”

“개로왕의 뒤를 이어 문주왕이 왕위에 올랐지. 하지만 즉위 2년 만에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고, 삼근왕은 허수아비로 살다가 즉위 2년 만인 15세에 세상을 떠났어. 뒤이은 동성왕 역시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지. 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알 위에 알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험한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상태가 되었단다.”

 

혜성같이 나타난 꽃미남 임금‘무령왕’
“정말 큰일이네. 백제가 망할 것 같아요. 멋지다는 무령왕은 언제 나타나요?”

이때 등장한 왕이 백제의 25대 무령왕(武寧王, 462~523년)이다.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무령왕은 40세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을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고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고 지방 통치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적 지위를 회복해야 했다.

“어휴~ 무령왕이 할 일이 너무 많네. 심란했겠지만 잘하셨죠?”

무령왕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 즉시 군대를 이끌고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했다. 이후 남하하는 고구려와 대적했으니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고 말갈을 물리쳤다. 또 고구려의 수출 통로를 막는 등 적극적인 대(對) 고구려 정책으로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왕족을 파견해 통치하는 담로제를 실시해 느슨해진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나라의 창고를 풀어 구제했으며, 벽골제 등을 정비해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렇게 무령왕은 쓰러져가는 나라를 안팎으로 재정비하며 튼튼하게 꾸려나갔다.

“휴~ 다행이다. 위태위태하던 나라가 다시 살아났네요. 무령왕은 정말 멋진 왕이에요.”

“그럼 멋지지. 업적만 멋진 게 아니라 생김새도 멋졌다는구나. 이름이 사마(斯麻,斯摩) 혹은 융(隆)인 무령왕은 큰 키에 얼굴은 그림 같았으며, 성정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을 많이 얻었다고 해.”

“얼굴이 그림 같았다고요? 와~ 요즘 말로 꽃미남이셨네.”

 

백제 시대에 이룬 글로벌 정책
“그렇게 멋진 왕이 여기 이렇게 누워 계셨단 말이지~.”

아이들이 재현된 무령왕릉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왕릉이 참 특이해요. 이거 벽돌이에요? 무슨 꽃 모양이 있어요.”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은 전축분(塼築墳) 무덤이다. 무늬가 새겨진 벽돌을 옆으로 눕혀 넉 줄 쌓고 그 위에 벽돌을 세워 한 줄로 나란히 쌓았는데, 세워놓은 벽돌 앞면에 연꽃무늬가 절반씩 새겨져 두 장을 포개면 하나의 연꽃무늬를 이룬다. 결국 벽과 천장이 온통 연꽃으로 채워지니 연꽃 가득한 불국 정토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이건 뭐예요? 등잔을 놓았던 것 같아요.”

“맞아, 그건 등감(燈龕, 등자리)이란다. 등감은 사후 세계로 가는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지. 그런데 그것 외에 또 다른 임무가 있단다. 등불을 켜놓으면 무덤 안의 산소가 점점 줄어들어 결국 진공상태가 되니 부장품이 부식되는 것을 막아준다.”

“와~ 백제 사람들은 정말 지혜롭네요. 배울 게 참 많아요. 과학적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무덤을 중국식으로 만든 것이 마음에 걸려요. 왜 그랬을까요? 우리나라 무덤 쌓는 기술이 부족해서일까요?”

그렇지는 않다.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가 얼마나 글로벌한 해상 왕국인지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무령왕릉의 진묘수와 굴식 전 축분, 매지권(武寧王陵買地券)의 형식은 중국 남조와 문화 교류 사실을 보여주고, 중국산 도자기와 한나라 때의 동전인 오수전(五銖錢)은 중국 대륙과 교류한 흔적이다.

목관 재료인 금송(金松)은 일본에서 수입했고, 둥근 고리 부분에 용이나 봉황을 새긴 환두대도(環頭大刀)는 일본으로 전했다. 색색의 구슬은 태국을 거쳐 동남아뿐 아니라 아라비아까지 교류 품목이었으며 관모와 관식, 금동 신발 등은 백제 금속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출토 유물이니 백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열도와 중국 대륙을 넘어 인도까지 해상 네트워크를 넓히며 선진문화와 기술의 전달자 혹은 중계자 역할을 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교류를 넘어 강한 국방력과 조선 기술이 상당한 발달했음을 의미한다.

 

아테네가 부럽지 않던 해상 왕국 ‘백제’
“그런데 얘들아, 백제(百濟)가 무슨 뜻인지 아니?”

“백제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

백제라는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100개 집단(집안)이 바다를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의미다. 백제의 시작인 온조의 신하가 10명이라 십제(十濟)라 했는데 비류의 백성(百姓)이 즐거이 따랐다고 해서 백제(百濟)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100개 나루터(항구,선착장)가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한강 금강 영산강 등 하천을 통한 내륙 물길과 바닷길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켜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니 ‘100개 나루터가 있는 나라’라는 명칭이 더욱 와 닿는다.

“얘들아, 박물관에서 본 그림 생각나니?

‘양직공도’말이야.”

공주박물관의 전시물 중 ‘양직공도(梁職貢圖)’는 6세기 중국 양(梁)나라 때 제작된 사신도(使臣圖)다. 양나라로 사행을 온 12국 사신의 모습과 풍습 등을 기록한 화첩으로, 무령왕 당시 ‘백제가 고구려를 크게 격파했다’고 전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백제사신을 소매 끝과 깃과 아랫단에 선을 댄 두루마기를 입고 관모를 쓴 단아한 모습이다. 이처럼 백제는 글로벌한 해상 왕국을 이루었는데, 문득 지중해의 해상 왕국 아테네가 떠오른다. 항구 100곳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백제는 아테네에 버금가던 해상 왕국이다. 기울어져가는 백제를 단단하게 일으킨 무령왕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밀고 내려오는 고구려를 먼저 되받아치고, 안으로는 백성을 다독여 민심을 모으고 한강을 잃은 대신 금강과 바닷길을 통해 더 큰 세계로 눈길을 돌린 점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안목과 시스템을 갖추었으니 실로 백제 사람들은 뛰어난 장사꾼이자 뱃사람이며 외교관이었다.

1971년 음력 7월 5일 장마철이 오기 전 배수로 정비를 하다가 우연히 발굴된 무령왕릉. 삼국시대 무덤 가운데 주인과 매장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첫 무덤으로 출토된 유물은 108종 4천600여 점이다. 이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에 이르는 무령왕릉의 묘지석(墓誌石,국보 163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 사마왕(斯麻王, 무령왕)께서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에 붕(崩, 황제의 죽음에 쓰는 말) 하셨다.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모시고 이와 같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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