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행사가 많다. 〈호두까기인형〉과 송년 클래식 공연이 난무하는 가운데 국립국악원에서 초대장이 왔다. 무심코 던져두었다가 다시 집었다. 국악이라… 피아노와 바이올린 학원에 비해 가야금이나 거문고 학원 찾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든 세대, 아이들에게 우리 음악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___글•사진 이동미

 

 

도마령을 넘어 금강이 휘돌고, 소백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땅으로 들어선다. 달빛과 친구 되는 월류봉을 지나면 난계 박연(1378~1458년)이 태어난 충북 영동 땅이다. 난계 박연은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손꼽히는 ‘국악의 성인’이다.

“엄마, 난계는 어떤 인물이에요?”

박연은 음악을 사랑한 사람이다. 고려 말에 심천면 고당리 308번지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밀양이며 시호는 문헌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어릴 때부터 피리를 불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3년간 시묘(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이 탈상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사는 것)하면서 더욱 피리를 가까이했다.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과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피리를 불던 소년은 비파, 거문고 등을 연주하는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신분이 미천한 광대에게도 배움을 청할 만큼 음악적 열망이 가득 찬 인물. 그가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타면 인근에 있던 짐승들이 몰려와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그리며 피리 불던 소년
“우와, 멋진 분이네. 새랑 짐승이 춤을 출 정도면 말이야.”

“그럼! 그분은 벼슬보다 피리를 좋아하셨대.”

“에이, 설마요.”

박연은 1405년(태종 5) 생원시에 급제하고, 6년 뒤(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오품 교리가 됐다. 집현전 교리로 일하면서 전악서를 찾아가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 사간원의 정언, 사헌부의 지평 등 벼슬을 지냈으며 1418년에는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문학이 되었는데, 이때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세자 저하, 저는 벼슬보다 피리를 좋아합니다.”

“그렇습니까? 피리 소리 한번 들려주세요.”

박연은 때때로 세자에게 좋은 가락을 들려주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피리 소리를 듣고 자란 세자가 바로 뒷날 세종대왕이 된 충녕대군이다. 박연의 음악 사랑을 익히 아는 세종이라, 박연을 관습도감의 악학별좌에 앉혔다.

“스승님께서는 벼슬보다 음악을 좋아하시니, 저를 도와 훌륭한 음악을 발전시켜주세요.” “전하,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이렇게 하여 박연은 어릴 때부터 품어온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호랑이가 악기? 하얀 상자도 악기?
아이들 손을 잡고 우리 악기를 볼 수 있는 난계국악박물관으로 들어선다. 편경, 편종 등 국악기가 전시되었으며, 전통 복장을 입고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모형을 통해 조선 시대 궁중 행사와 음악을 엿볼 수 있다. 일부 악기는 직접 연주해볼 수도 있다.

“엄마, 이것도 악기예요? 호랑이처럼 생겼는데… 장난감 아닌가?”

“이건 상자에 방망이가 끼워져 있어요! 이것도 악기예요?”

아이들은 국악기를 보며 흥미로워했다. 호랑이 모양 ‘어’와 네모난 상자에 방망이를 넣은 ‘축’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축은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해온 타악기로, 종묘제례악이나 문묘제례악 같은 제례악에서 주로 사용된다. 동서남북 중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칠해놓았는데,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 하루의 시작과 관련 있듯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축에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칠한 것이다. 방망이로 상자 밑바닥을 세 번 치고 북을 한 번 치는 것을 세 번 반복한 다음, 박을 한 번 치면 음악이 시작된다. 반면에 엎드린 호랑이 모양을 한 어는 흰색이다. 등줄기에 톱니(서어)가 27개 있어 끝을 9조각으로 쪼갠 견(대나무 채)으로 호랑이 머리를 세 번 친 다음 호랑이 등을 한 번 긁는 것을 세 번 반복하면 음악이 끝난다.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축은 동쪽에 놓고, 음악의 끝을 알리는 어는 서쪽에 놓는다. 이렇듯 우리의 국악기는 색과 위치에 따라 많은 의미가 있다.

“우와, 정말 재미있네. 이런 걸 다 난계 선생님이 만드신 거예요?”

 

조선 전기 음악의 기틀을 잡은 난계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 박연의 활약은 시작되었다. 1426년(세종 8)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향악(우리나라 음악을 당악과 구분해 이르는 말), 당악(신라 시대 이후에 전래된 중국 속악) 등을 조사했다. 악기의 그림과 악보를 실어 악서를 편찬하자고 상소하기도 했다.

 또 편경과 편종을 연구하여 편경 12개와 거기에 맞는 12율관을 새로 만들고, 정확한 음률로 아악을 연주할 수 있게 했다. 3년 뒤에는 이것을 수정하여 우리 음악으로 완성했고, 아악의 악보도 편찬했다. 이를 바탕으로 1431년 정월 초하룻날 근정전에서는 처음으로 조회악이 연주되었으니 여기에는 박연이 새로 만든 편경과 편종, 그 밖에 개량한 악기가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묘제례악에 쓸 악기를 만들어 종묘제례악을 완성했다. 종묘제례악은 오늘날까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인다.

“어? 누나 이름이랑 똑같아. 소라! 그걸로 악기를 만들었네.”

소라 껍데기 뾰족한 끝에 구멍을 뚫고, 그리로 불어 소리를 내는 나각은 자연 재료를 그대로 이용한 악기다. 버튼을 누르면 악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설 앞에서 아이들은 이것저것 눌러본다. 세종 앞에서 편경의 시범을 보이는 난계의 모습은 물론, 국악에 대한 모든 것을 접할 수 있으니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1층에는 국악실과 난계실과 영상실이 있고 2층에는 정보 검색 코너와 국악기 체험실이 있다.

 

난계의 손길을 따라 해보는 장구 체험
이번에는 공방으로 향한다. 난계국악박물관에는 타악기공방과 현악기공방으로 구성된 국악기 제작촌도 있다. 현악기공방에서는 거문고, 가야금, 아쟁 등 현으로 된 모든 악기를 만든다. 타악기공방에서는 장구, 북 등 때리는 악기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명주실이 악기의 소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무는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 칠은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 등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방학 기간에는 해금, 가야금, 거문고 등 현악기를 만드는 특별 강좌가 개설된다.

아이들과 함께 타악기공방의 미니 장구 만들기를 시도해보았다. 실물보다 작게 제작된 장구 몸통에 가죽 판 두 개와 끈, 세모꼴 부전 등이 준비되었다. 이것이 정말 장구가 될까? 소리가 날까? 의심 반 재미 반으로 만들어보는 악기는 아이들에게 국악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한다.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장구 소리가 정말로 났다!

 

우리 것을 익히고 사랑해보는 겨울밤
정원에 난초가 많아 ‘난계’라는 호를 얻은 박연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내려와 말년을 보내며 옥계폭포를 자주 찾았다. 박연이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날아가던 새와 짐승들이 연주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박연이 자주 찾는다 하여 사람들은 이를 박연폭포라 불렸다. 난계 박연을 모시는 난계사가 고당리에 있고, 그 끝에 난계 선생의 묘소가 있다.

다 둘러보고 나서 학산면 지내리의 금강모치마을로 향한다. 우리 전통의 겨울밤을 보내기 위해서다. 이곳에서는 찹쌀떡(‘모찌’는 일본어)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반은 먹고, 반은 만들며 깔깔대는 분위기가 아주 좋다. 깊은 밤이면 들려오던 “찹쌀떡 사려, 메밀묵!”의 향수를 아이들은 알 리 없지만, 어른들은 추억을 떠올리고 아이들은 그 소리를 흉내 내며 함께 웃는다.

밖에서는 마을 어른들이 깡통에 구멍을 숭숭 뚫고 안에 숯을 넣어 ‘망우리 돌리기’를 하신다. 정월 대보름에 시골에서 하는 놀이지만, 망우리 돌리기를 해본 적 없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겨울철 체험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겨울 밤하늘에 동그랗게 그려지는 망우리의 원은 한없이 돌아가고, 시골 겨울의 밤도 그만큼 깊어간다. 내일은 짚으로 참새 잡는 덫을 만든다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잠든 아이들의 얼굴이 달빛보다 해사하고, 별빛보다 영롱하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보다 찹쌀떡이 맛있고, 바이올린 소리보다 가야금 소리가 아름답다는 걸 진작 알려주지 못한 것이 불현듯 미안하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것’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겁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하나를 마무리한 것 같아 조금은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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