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새해가 밝아온다. 새해맞이 여행지로 어디가 좋을까? 이리저리 고민해보지만 역시 동해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고 싶은 의욕을 일깨우는 바다, 바다를 힘차게 품어보자. 누구보다 먼저 동해의 붉은 해와 푸른 물결을 가슴에 담아보자. _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와, 바다다!” 시원한 동해 앞에 선다. 여기는 동해구(東海口)다. 경주의 대종천 물길과 동해가 만나는 곳, 동해의 입구인 봉길 바닷가다. 신발을 벗고 무작정 뛰어들 수 있는 계절은 아니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동해에 섰다.

“성묵아, 바닷속엔 뭐가 있을까?”

“고래요! 그리고 고등어랑, 문어랑, 갈치랑….”

“얘는 만날 먹는 것만 생각해. 그렇죠, 엄마~.”

“그러네… 소라는 저 푸른 동해에 무엇이 있을 것 같아?”

“음… 새해 첫날 바다 앞에서 물으시는 걸 보니 꿈이나 희망,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지. 엄마는 말이야, 저 바닷속에 커다란 용이 있는 것 같아.”

 

위대한 통일 군주, 문무대왕
두 눈이 동그래지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걸음 내디뎌본다. 푸른 파도가 신발 끝에 닿을 듯 말 듯 장난을 건다. 포말 끝자락으로 태종무열왕(604~661년)과 그의 아들 문무왕(626~681년), 또 그의 아들 신문왕(?~692년)이 어렴풋이 스쳐간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은 당나라와 손잡고 고구려 사비성을 함락한 뒤 승전보 속에 생을 마감했다. 이어 문무왕이 왕위를 이으니,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김유신의 누이 문희)의 맏아들이자 신라 30대 임금이다.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를 물리쳤다. 그리고 재위 15년 만인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기고 당나라까지 몰아내며 진정한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한반도의 형세로 보아 경주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으니 북원소경과 금관소경을 설치해 효율적으로 통치했고, 사천왕사를 세우고 안압지를 조성하며 통일신라를 꽃피웠다.

 

“나 죽어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리라”
“얘들아, 저기 저 바위섬 보이니? 저곳에 문무대왕이 계신대.”

“정말요? 왕릉은 모두 커다랗게 산처럼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곳 바다에 계세요?”

아들 녀석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사실 경주에 산처럼 큰 왕릉이 수두룩하지만 바다에 묻힌 왕은 동서고금을 찾아봐도 흔치 않다. 〈삼국유사〉에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는 구절이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

삼국이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은 평화롭게 살았지만, 문무왕에게는 근심이 하나 있었다. 바로 왜구다. 해서 죽은 뒤에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어 왜구를 막을 테니 자신이 숨을 거두고 열흘 뒤에 동해에 장사 지내라 한 것이다. 공연히 재물과 인력을 낭비하지 말고 초상 치르는 절차를 검소하게 하라고도 했다. 그가 남긴 유언에 존경심이 배가되며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사적 158호로 지정된 경주 문무대왕릉은 봉길 해변에서 200m쯤 떨어져 있다. 동서남북으로 십자 수로가 나 있어 동쪽에서 파도를 따라 들어온 바닷물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잔잔하게 흐르다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진다. 가운데는 문무왕이 안치되었을 거라 추측되는 길이 3.7m, 폭 2.06m의 넓적한 거북 모양 돌이 덮여 있다.

“그럼 저 속에 문무대왕님이 누워 계시는 건가요? 추우시겠다.”

사실 ‘화장한 뒤 유골을 안치했다’ ‘화장한 뒤 뼛가루를 뿌린 곳이다’ 등 의견이 분분해 어떤 형태로 잠들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몰라요? 그렇게 깊어 보이지 않는데요.  잠수부가 들어가서 돌 들어 올리고 보면 될 것 같은데요.”

“허허허, 녀석…. 1982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시도한 적이 있단다. 하지만 다이버가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에 조사를 포기했지.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왕암에 서린 문무왕의 백성 사랑과 동해 용에 대한 의미를 더 높이 평가한 거지. 경주나 기타 지역에 있는 왕릉도 땅을 파지 않고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 있지만, 일부러 하지 않는단다. 다음 세대에게 물질이나 기술보다 믿음이나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소중할 때가 있단다.”

 

용이 된 문무왕을 본 곳, 이견대
“우리 이제 용을 보러 이견대로 갈까?”

“이견대요? 용을 보러 간다고요?”

말꼬리를 돌리며 아이들을 데리고 이견대로 간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이견대(利見臺) 아래 칠십 보를 나가면 바다 속에 돌이 있으니 (중략) 이곳이 장사 지낸 곳이다’라 쓰였으니 문무왕의 수중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다는 곳이며,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곳으로도 알려졌다.

때는 임오년(682) 5월 초,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한다는 보고와 함께 귀한 선물을 받을 거라는 일관(천문을 맡은 관리)의 말에 따라 신문왕이 기뻐하며 살펴보게 했다. 산 모양은 거북 머리처럼 생겼고 꼭대기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는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주는 선물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일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그쳤다. 해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 : 거센 물결을 잦아들게 하는 피리)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아 천존고에 보관했다고 한다.

“아빠! 만파식적 이야기는 들은 것 같아요. 정말 신기해요. 그런 피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빠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동해를 지키다 쉬러 가는 곳, 감은사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요? 문무대왕의 용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그래? 그럼 이번에는 감은사지로 가볼까?”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지은 사찰이다. 하지만 절이 완성되기 전에 문무왕이 승하하니,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 절을 완성했다. 현재는 건물 터만 남았다.

“우와, 무슨 탑이 이렇게 커요? 에펠탑보다 큰 것 같아요.”

국보 112호로 지정된 감은사지삼층석탑은 정말로 크다. 높이가 9.5m고, 그 위에 3.4m의 철제 찰주(刹柱)가 서 있으니 고개를 바짝 젖히고 봐야 한다. 삼국 통일 뒤 고구려의 씩씩한 기상과 백제의 우아한 세련미, 신라의 소박함이 어우러진 동탑과 서탑은 1천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동해를 굽어보며 굳건히 서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모습은 동해를 침범하는 왜구를 제압할 만큼 위엄 있는 자태다. 감은사지는 1959년 발굴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금당, 강당, 회랑과 쌍탑 식 가람의 배치가 밝혀졌는데 여기에 특이한 점이 있다. 금당 뜰아래 동쪽을 향한 배수로 같은 구조가 보이는 것이다.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이 수로를 통해 감은사 법당 밑에 들어와 쉬게 하기 위함이라고. 1천3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전문가가 아니니 수로의 형태를 정확히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충분히 보이고 또 읽혔다.

 

가슴 속까지 뜨끈한 감포항 복국
아침부터 찬 바람 맞으며 봉길해수욕장과 이견대, 감은사지를 돌아다녔더니 온몸이 꽁꽁 얼었다. 오른쪽으로 철썩이는 파도를 친구 삼아 31번 국도를 따라 올라간다. 길가 도로에서 귀미역(‘미역귀’를 지칭하는 경상도 사투리)을 말리는 할머니 뒤쪽으로 갈매기가 쉴 새 없이 날고, 손자는 찬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발자전거를 타며 할머니 주위를 맴돈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신문왕 3대에 걸친 삼국 통일과 나라 사랑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손자에게 이어지는 눈길과 오버랩 된다. 아버지의 뜻을 잇고, 그 아버지의 뜻을 이어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세 왕이 있었기에 통일신라가 찬란하게 꽃피었을 것이다.

과메기를 만드느라 분주한 감포항에서 복국을 한 그릇씩 주문했다. 초록빛 미나리 줄기와 아삭아삭 씹히는 콩나물이 맛나 보이는 복국을 한 수저 떠먹으니 담백하고 시원하다.

아이들도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 한 그릇 뚝딱이다. 새해 첫날 먹는 뜨끈한 복국, 아니 福국이다! 배를 든든히 하고 감포항 구경에 나섰다. 감포 어시장에 오징어와 멸치, 말린 생선, 미역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방파제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눈이 아릴 정도로 하얀 등대가 서 있다. 그 등대를 보며 딸아이가 한마디 한다.

“아빠, 대왕암을 조사하려다가 왜 그만두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두려움’보다 ‘믿음’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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