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번 여행은 저한테 맡기세요”

경주는 이번 학년에만 세 번째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여행지인데 이번 여행이 각별했던 이유는 초등학교 5학년 맏딸이 여행의 총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꽤 고생하거나 여행 경비에 적잖이 누수가 생길 거라 각오했지만, 자식 가르친 보람 제대로 느끼게 해준 뿌듯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자신감 하나는 확실히 충전해준 고마운 여행이다. _취재•사진 강현정 리포터 sabbuni@naver.com

 

 

아이에게 여행을 맡기다
요즘 부쩍 여행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역마살 하나는 타고났기에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살았고, 나름 여행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자랐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좋은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 먹은 걸로 끝난 건 아닌지. 아이들 앞세우고 다녔지만, 따지고 보면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취미 생활에 아이들을 들러리 세운 정도라는 반성도 든다.

여행을 통해 교육적 효과를 얻으려면 아이들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무엇보다 아이들이 결정권을 맡는 데 초점을 뒀다. 부모도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최종 결정은 아이들이 내리고, 세부적인 계획도 맏딸에게 맡겼다. 각자 한마디씩 발언 기회는 주어졌지만, 회의 진행과 결정도 맏딸 주영이에게 일임했다. 드센 동생에 치여 얌전하게 지내야 하던 아이에게 모처럼 권위를 심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렇게 정해진 여행지가 경주. 아이 말에 따르면, 자기들 나이에 경주가 가장 알맞은 여행지이기 때문이란다.

 

우리 딸의 재발견, “오, 제법인데!”
엄마 입장에선 여행 계획 세우느라 오랜 시간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게 보기 싫은 면도 있었다. 여행 계획 짜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닐까? 스스로 꽤 멋있는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공부 시간을 많이 뺏기는 건 아닌지 자꾸 아이를 살피는 내 모습에 얼마나 자학했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주도권을 넘긴다는 게 못난 엄마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중에 물어보니 아이는 “경주의 명소를 찾아보느라 시간이 많이 들긴 했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이 정한 ‘남산 트레킹’ 코스를 가족이 함께 여행했다는 점이 가장 뿌듯했다고 한다. 역사 여행으로 인정을 받아보더니, 다음엔 중국의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가보거나 부여로 백제 역사 여행을 계획해보고 싶다고도 한다.

먹는 문제만 빼면, 엄마가 걱정한 것보다 실수도 없었다. 우리가 정한 숙소와 아이가 뽑아놓은 음식점이 너무 멀어 정성껏 모은 정보를 이용할 수 없었다는 점, 남산 트레킹에서 뼈저린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는 점만 제외하곤 대체로 훌륭했다. 내 딸의 재발견이랄까. 가는 데마다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우리 주영이 정말 대단한데!”를 연발하고 다녔더니, 엄마에게 인정받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열 마디 칭찬보다 진심 어린 인정에 아이가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100점짜리 여행이 됐다.

 

게스트하우스, 딱 내 스타일이야!
이번 여행에서 우리 부부가 개입한 건 딱 하나다. 숙소 예약. 경주는 호텔이나 콘도 등 웬만한 숙소가 보문관광단지에 모여 있다. 하지만 유적지는 대부분 경주 시내에 분포해 숙소와 관광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셈. 기왕이면 경주 시내에서 숙소를 잡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경주역 근처 숙소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바로 게스트하우스다.

경주에는 게스트하우스가 꽤 여러 곳 있다. 게스트하우스는 주로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이용하는 숙박 형태로, 침실은 각자 쓰되 취사장과 샤워실을 공동으로 쓴다. 2인실, 3인실, 그리고 도미토리로 4인실과 10인실 등이 있다. 배낭여행자라면 도미토리에 묵으며 다른 여행자들과 경험담을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는 어차피 침대 4개가 필요해 4인실을 예약했다.

가격은 어른, 아이 구분 없이 1인당 1만8천 원. 가격도 저렴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됐다. 2층 침대 두 개. 방 안에 달랑 침대 4개와 화장실, 개인용 로커가 전부인 도미토리에 묵어보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경주의 게스트하우스들은 1층 공동취사장에서 무료로 식재료를 제공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달걀과 식빵, 버터와 잼, 커피 등을 갖다 놓고 먹을 사람이 알아서 요리하는 시스템이었다. 가뜩이나 요리하길 좋아하는 우리 딸들은 이게 웬 횡재냐며 신나게 달걀 프라이며 토스트를 해 먹었다. 집에서는 주방 어지럽힌다고 엄마에게 번번이 제지를 당했건만, 이곳에서 먹고 싶을 때 자유롭게 요리해 먹는 시스템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뜸 “엄마, 우리 집도 게스트하우스처럼 이렇게 해놨으면 좋겠어요” 한다. 

 

1950년대 새겨진 걸로 추정되는 불상.
경주 남산, 신라 최고의 노천 박물관
우리 딸의 여행 프로젝트 최고의 야심작은 남산 트레킹이었다. 지난번에 와서 불국사도 가보고 경주 시내 주요 유적지도 모두 둘러봤기에, 이번엔 색다른 경주 여행을 찾아보다 발견했다고 한다. 남산은 그야말로 신라의 노천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북쪽으로 금오봉, 남쪽으로 고위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4km, 남북으로 10km 뻗어 있는 타원형 산으로 한 마리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한다.

대학 때 같은 과 친구 고향이 경주였는데, 경주는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던 말이 생각난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남산에 오니 그 친구 얘기가 생각났다. 산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탑이 하나 나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위에 새긴 불상이 나오는 곳. 이곳엔 국보 312호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해, 유형문화재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한둘이 아니다. 산 전체가 보물이라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유물이 산에 그대로 펼쳐져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굉장히 신비로웠다. 유물들을 유리관 너머, 울타리 너머가 아니라 코앞에서 볼 수 있어 좋았다. 산을 오르며 그 유물들을 하나씩 발견해가는 즐거움은 마치 내가 고고학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주영이가 특히 뿌듯해한 남산 트레킹 코스.
평발 가족의 남산 트레킹, 부실 체력을 입증하다
주말이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경주 남산 유적 답사 코스가 여럿 있는데, 미리 일정을 알고 예약하면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다. 딸에게 여행 계획을 맡길 때만 해도 남산 트레킹까지 알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경주 남산은 아이 주도 여행의 정점을 찍게 해준 최고의 코스가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말이다. 평소 땀 흘리기 싫어하는 우리 가족은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는데, 답사 코스가 어찌나 벅차던지 몰랐으니 도전했지, 솔직히 두 번은 못 갈 것 같은 코스다. 생각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답사 코스는 남산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정상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얌전한 등산로로 다니는 게 아니다.

험한 산길을 헤치고 올라가 정상 부근에선 (살짝 과장 섞어) 암벽을 통과해야 했다.

등산화도 갖춰 신지 않은 평발 가족이 도전하기엔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산길을 가다 바위를 만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상이 새겨져 있고, 또다시 덤불을 헤치고 올라가다 보면 뜬금없는 장소에서 탑이 하나 발견되는 곳.

남산 트레킹의 생생한 답사는 흥미로운 경험에 틀림없지만, 우리 가족에겐 부실 체력을 여실히 입증한 참혹한 트레킹이었다. 평소 산행 경험이 좀 있어야 가능할 것 같고, 초등 저학년에게는 무리가 될 수도 있겠다.

트레킹은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해 오후 3시까지 이어졌다. 물과 수건,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뿔싸, 딸을 너무 믿었나 보다. 아무 준비 없이 덜렁덜렁 몸만 도착한 사람은 우리 가족뿐. 다들 배낭에 물이랑 도시락을 싸들고 온 것이다. 정상에 올라가서 점심을 먹는다는데, 우리만 쫄쫄 굶게 생겼다.

남들은 떡이랑 바나나, 과일, 과자 등을 야무지게도 싸왔던데, 우리만 빈손이다. 내심 ‘설마… 애들도 있는데 떡 하나 먹어보라고 권하겠지?’ 생각했건만, 천만의 말씀이다. 산 올라오는 길에 구멍가게에서 산 보리건빵 한 봉지가 없었다면 우리 가족, 정말 불쌍해 보일 뻔했다. 일행 중 김밥 두 줄을 사온 부부가 있었는데, 그때 그 김밥이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경주 여행 뒤 김밥에 한이 맺혀 한동안 점심 메뉴가 김밥이었다. 가뜩이나 휘청거리며 올라갔는데 보리건빵 몇 개로 점심을 때웠으니, 그 고생을 무엇에 비유할까.

 산행을 마치고 시내에 돌아오니 오후 4시. 부랴부랴 식당을 찾아 늦은 점심을 먹는데,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어찌나 식탐이 발동했는지 모른다.

행복이란 별게 아니구나. 메뉴판을 바라보던 우리 가족의 눈에 행복이 있었다. 얼마나 허겁지겁 먹었는지, 다 먹은 뒤에야  경주에서 소문난 맛집 순두부찌개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을 알았다. 어차피 여행의 즐거움은 추억으로 남는 법. 정상에서 배고팠던 기억도, 내려와서 행복했던 만찬도 우리 가족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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