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 무대로 잘 알려진 순천만은 광활한 갯벌과  갈대숲으로 구성된 명실상부한 자연의 보고다. 봄에는 안개를, 여름에는 갯벌을, 가을에는 칠면초와 갈대를, 겨울에는 천연기념물 흑두루미를 비롯한 철새를 만날 수 있는 곳. 새해맞이로 찾은 순천만에서 위대한 자연을, 한없는 위로를 품고 돌아왔다._취재•사진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사진•자료 협조 순천시청•순천문학관

 

 

순천에서 문학을 만나다
그 이름 앞에서 울컥했다.

기억에도 생생한 21세기 첫 폭설이 내린 새벽, 그 눈길을 따라 먼 세상으로 떠나신 분. 동화 작가 정채봉 선생은 리포터의 은사님이다. 서울 아산병원의 빈소에서 스승을 마지막으로 뵙고, 11년 만에 순천의 정채봉관에서 그분을 마주하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다가 아스라이 여인의 인조 비단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있는 순천만에 가보세요. 갈대가 훌쩍 키를 넘고 있으니까요.
순천만, 송광사와 선암사, 낙안읍성, 주암호…
순수한 동심이 있는 우리 고향 순천 길이 그대의 발길에 위안을 주리라 믿습니다.
부디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아름다운 풍광 두르소서.
- 정채봉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한 고향 순천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분의 기원처럼 순천은 내딛는 걸음마다 감동과 위로를 주었다. 새해맞이로 찾은 순천에서 뜻하지 않은 스승과 조우, 너무나 큰 축복이었다.

서울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여기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순천문학관’이다. 공원에서 15분 정도 걷는 거리에 위치한 순천문학관은 순천 출신의 동화작가 정채봉과 소설가 김승옥을 기념하기 위해 2010년에 지어졌다. 소박해 보이는 초가는 각각 정채봉관, 김승옥관으로 두 문학인의 생애와 예술 세계가 오롯이 펼쳐졌다.

정채봉은 순천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승달과 밤배’ ‘오세암’등을 쓴 그는 어린이들만 읽던 동화의 독자층을 성인으로 확대하며 한국 아동문학 부흥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정채봉관에는 작가의 육필 원고와 사진, 펜, 안경 등의 유품, 소설책들이 전시돼 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또 연극과 뮤지컬로도 유명한 동화 ‘오세암’에서 암자로 흘러온 고아 남매에 대한 이야기의 설명이 세세히 적혀 있다.

김승옥관에서는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순천의 공간을 재구성해 탄생시킨 ‘무진기행’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무진기행’에서 순천만 연안 안개나루(무진•霧津)로 소개한 대대포 앞바다와 갯벌에서 체험을 창작의 모티프로 삼았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에서

한국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는 소설가 김승옥, 아동문학의 선구자 정채봉 외에도 순천이 길러낸 문인들은 소설가 조정래나 서정인, 시인 송수권과 허형만 등 우리 문단의 획을 그은 분들이다. 순천(順天)은 말 그대로 ‘순한 하늘’이다. 그 하늘과 토양이 배출한 작가들의 문학적 생명력의 뿌리를 찾은 것 같은 뿌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갈대숲에 내린 자연의 오케스트라
“꺄아아악~”

넓디넓은 갈대밭이 펼쳐진 순천만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함께 간 남편과 아이들은 창피하다며 만류했지만, 갈대숲과 마주한 첫 느낌은 그야말로 가슴에서  바닷길이 쫙 열린 듯한 느낌이다.

순천만은 총연장 40km 정도의 해안선으로 둘러싸였다. 갯벌, 갈대밭, 염습지 등이 고루 발달한 자연의 보고다. 갯벌 면적은 2천645㎡((800만 평,) 갈대 군락지는 231만㎡(70만 평)이다. 세계 5대 연안 습지 중 하나로 국제습지조약인 람사르협약에도 등록됐다. 자연을 파괴한 새만금 갯벌의 상처를 비로소 순천만 갯벌에서 보상받는 느낌이다. 무성한 갈대숲 아래 습지에서는 게와 짱뚱어 등 수많은 갯벌 생명체들이 터전을 마련하고 있으니 말이다. 2m가 넘게 쭉쭉 자란 갈대들이 솜털만큼 부드럽게 마른 씨를 이고 겨울 오후 햇살에 반짝인다. 갈대밭을 휘감아 도는 나무 데크의 길이는 0.8km. 천천히 걷다 보면 바람에 서걱거리는 갈대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자연의 오케스트라다.

순천만 갈대숲을 감상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왕복 1시간 30여 분에 이르는  도보로 갈대숲길(나무 테크)의 시작점인 무진교에서 용산전망대까지 오르는 것이다. 흔들다리를 지나 전망대에 오르지 않으면 순천만 갈대숲을 다 보지 않은 거란다. 다리를 건너 산자락에 이르자 솔잎 향이 그윽하다. 오솔길은 굽이치며 위로 치닫는다. 보드랍고 정겨운 흙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경사가 완만하지만 돌아가는 ‘명상의 길’과 정상에 빨리 도달하지만 경사가 급한 ‘다리 아픈 길’이 나온다. 늘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네 인생을 말해주는 듯하다. 산길을 30분쯤 걸어 용산전망대로 올랐다. 바다로 나가서 살펴보면 ‘산이 용을 닮았다’고 해서 용산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의 갈대숲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장관이다. ‘하늘이 내린 정원’이라는 찬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갈대숲은 안개에 싸여 마치 둥근 섬처럼 점점이 떠 있고, S자형 물굽이와 함께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선상 투어로 갈대숲을 돌아봐도 좋다. 대대포구에서 출발해 약 40분 동안 S자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직접 그림처럼 물위를 가로지른다. 순천만 가장 안쪽의 갯벌과 거기 사는 짱뚱어, 게 등 갯벌 생물 그리고 후드득 물을 차고 날갯짓을 하는 새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흑두루미, 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 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해 200종이 넘는 조류가 순천만 갈대밭에 둥지를 틀고 산다.

알 수 없는 연민과 그리움에 가슴에서는 저 유명한 신경림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이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그 연약한 갈대들이 당당히 숲이라 불리는 까닭을 알겠다. 바람이 몰려올 적마다 흔들리는 슬픔, 바로 곁에 있는 그대를 천리처럼 안타까이 부르는 아득한 몸짓, 칼바람에 함께 쓰러지며 다시 일어서는 갈대의 춤사위를 보았다. 그 멀고 긴 쓰러짐의 힘이 다시 숲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리라. 순천만이 시시각각 다른 빛깔로 물들어간다. 누르스름하던 갈대밭은 찬란한 황금빛으로, 하늘은 주홍, 보라를 거쳐 잿빛으로 차근차근 옷을 갈아입는다. 신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이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 있는 자연생태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낮에는 새를 보고, 밤에는 별을 보는 천문대’가 있다. 별과 친해질 수 있는 과학 체험과 순천만의 다양한 철새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생태 체험이 가능한 공간. 디지털 천체 투영 시스템으로 누워서 우주 탐험 애니메이션도 볼 수 있다.

순천만에서 자연 생태 체험으로 눈을 맑게 했다면,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선암사와 송광사에서는 마음의 때를 벗길 수 있다. 두 사찰은 조계산을 통로로 해서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

순천만을 먼저 둘러본 경우라면 선암사로 이어가는 게 좋다. 순천은 이외에도 옛 모습을 간직한 낙안읍성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드라마 촬영장, 흥미로운 고인돌공원 등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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