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세배하러 나설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 안에서 제일 큰 어르신이 갑자기 위독하셔서 엉거주춤 병원에서 새해 인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밝게 웃으며 속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쌈짓돈을 꺼내주던 어르신이 누워 계시니 마음이 짠하다._취재•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생로병사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제이자 동반자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아프지 않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차가운 콘크리트 병원 건물을 나서며 조선 최고, 아니 동양 최고의 의사 허준이 떠오른다. 

“엄마, 의사가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아닌가 봐요?” 어린 아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본다. 그렇지,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지.

“그런데 성묵아, 혹시 ‘허준’이라는 의사를 들어본 적 있니?”

“허준? 허각은 아는데요.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잖아요. 가수 허각의 형이 의사예요?”

 

과거도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양반, 허준
허준(1539~1615)은 조선 선조 때의 사람이다. 할아버지 허곤은 무관 출신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으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 김씨는 양반이 아니었다. 양반 가문의 서녀로 추정되니 허준은 ‘서자’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지만, 조선 시대 가장 큰 장애물인 서자 딱지(?)를 달고 태어났으니 과거 응시 자격조차 없는 반쪽자리 양반인 셈.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태어난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사람을 차별해요?”

제법 머리가 굵은 딸아이가 질문한다. 글쎄,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딸아이와 달리 당시 사람들에겐 서자에게도 과거 응시 자격을 줘야 한다는 얘기가 불합리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허준에 관한 이야기는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알려진 게 대부분이라, 의학에 관심을 둔 이유나 학습 과정 등은 알 길이 없어 아쉽다. 다만 내의원(왕을 비롯한 궁중의 왕족과 대신의 치료를 담당하던 국가 최고의 의료 기관)에 들어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면서부터 그에 관한 공식 자료가 보인다.

그 전에는 선조 때 유학자 유희춘 문집에 잠깐 언급된다. 유희춘 일가의 병 치료에 참여하고 교류했으며, 1569년 유희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몇 년 뒤 허준은 내의원 첨정에 오르는데, 이는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취재(과거 이외에 인재를 뽑기 위해 실시한 특별 채용 시험)에 합격해 의관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허준은 내의원에서 근무했으며, 많은 공적을 세워 서자 출신인데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허준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경남 산청
허준 선생이 의술을 펼친 경남 산청에 도착하면 거리 벽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약재를 말리고 썰고 천장에 매단 모습이나 환자에게 침을 놓는 광경 등이 의원으로 활동하던 허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지리산 자락에 안겨 있어 산과 물과 사람이 맑다는 산청에는 발 딛는 곳마다 약초가 자란다.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적어 산청 약초는 종류가 다양하고 효능이 좋기로 유명하다.

약초가 많아서일까. 한의학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류의태 선생이 의술을 펼친 곳도 산청이다. 산청군 금서면 특리 왕산 자락에는 류의태 선생이 한약 조제에 이용한 약수터가 있고, 주변에는 산청한의학박물관과 약용식물원 등을 갖춘 전통 한방 휴양 관광지가 조성되었다. 류의태 선생과 허준 선생의 동상이 있고 ,진맥을 통해 아픈 곳을 살펴 약을 지을 수 있는 한의원도 있다. 산청을 ‘한의학의 고장’이라 내세울 만하다.

허준의 의원 생활을 옆에서 보듯 상세히 알 수 있는 산청한의학박물관을 나서면 산책로가 이어진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해부 동굴이 나온다. 허준 선생이 스승인 류의태의 장기를 열어보던 동굴 속 장면을 재현했다. 시신을 해부하며 인체 구조와 위치 등을 확인하는 허준의 모습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아빠, 병원이나 TV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긴 왜 왔어요?”

“성묵아,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 했단다.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하지 않는 게 효의 시작이라는 뜻이야. 그러니 사람의 몸을 갈라 내장 기관을 꺼내고 조사하는 건 조선 시대에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의사가 인체 구조를 알지 못하는 건 치명적인 일이야. 해서 허준의 스승 류의태는 자신의 몸을 해부해보라고 했지. 허준을 아끼고 조선 의학의 발전을 위한 류의태 선생의 결정은 당시로서는 아주 큰 결심이란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사람의 속을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병을 고쳤어요?”

“성묵아, 기억 안 나? 한의원에 갔을 때 선생님이 손목만 잡아보고 약을 지어주셨잖아.”

“그러네, 참 신기해요.”

 

조선을 넘어선 동양 제일의 의원, 허준
허준은 1590년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다른 의원들이 감히 나서지 못할 때 허준이 광해군을 치료한 것. 당시 서얼에게 주는 벼슬은 정삼품 당하관이 최고였는데, 선조는 정삼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벼슬을 내렸다. 임진왜란 중 또 한 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고, 피란길에 선조를 보필하며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허준에게 선조는 “온갖 처방을 덜고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이때부터 허준은 <동의보감>에 관한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러 명이 투입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뒤 허준 혼자 작업하여, 선조 29년(1596)에 시작한 작업이 광해군 2년(1610)에야 완성되었다. 1613년에 금속활자로 발행되었으니 25권 25책으로 구성된 <동의보감>(보물 1085호,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의 탄생 이야기다.

“헉, 14년이나! 정말 대단하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요.”

<동의보감> 집필에는 여러 가지 의의가 있다. 우선 의서 500여 권을 참고해 내용이 풍부하다. 병의 증상과 해설, 처방에 본인의 경험까지 기록했다. 또 등한시하던 국내 의학을 중시해 체계를 세웠으며, 우리 약재 640여 개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했다. 어려운 의서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처방을 잘못 내리는 병폐를 막고, 의원 뿐 아니라 백성도 글을 알면 자신의 증상과 처방을 알 수 있도록 한 것. 전란 뒤 황폐해진 당시 백성을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다.

 

서자에서 의원, 의성으로 신화가 된 인물
<동의보감> 외에도 많은 의서를 남기며 의술로 박애를 실천해 ‘의성(醫聖)’이란 수식어가 붙은 허준. 서자로 태어났으나 내의원의 의원을 거쳐 신분 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에도 종일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다. 1615년에 눈을 감았고, 사후에는 정일품 보국숭록대부의 작위가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주는 것)되었다. 그가 만든 ‘저미고’로 많은 사람들이 천연두를 고쳤다. 그의 손을 거치면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과 일본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18세기에 나온 <약파만록>에는 허준이 코끼리를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또 병을 치료해 준 호랑이에게 받은 금침으로 중국 천자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까지 회자되니 허준은 단순한 의원을 넘어 신화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얘들아, 낭중지추란 한자 성어 들어본 적 있니? 무슨 뜻일까?”

“한자를 어떻게 쓰는데요?” “주머니 낭(囊), 가운데 중(中), 갈 지(之), 송곳 추(錐)를 쓰지.”

“주머니 가운데 송곳? 음, 찔린다? 삐져나온다?” “아, 무기를 가진 무서운 사람!”

낭중지추, 주머니에 넣은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그 끝이 주머니를 뚫고 삐져나온다는 뜻이니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절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면 언젠가 빛을 발한다는 것.

허준을 본보기로 우리 아이들도 잘 자랐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이다. 묵묵히 무언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하고,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며 마음속으로 격려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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