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시어머니와 동행한 강원도 영월 여행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출발하는 날 누군가의 잔기침으로 시작된 독감주의보는 가는 내내 우리를 매섭게 집어삼켰고, 결국 60대 중반인 시어머니부터 세 살배기 아들까지 ‘바이러스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3시간 만에 영월에 도착해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읍내 소아과다.취재·사진 박지현 리포터 true100@empal.com

 

 

1카메라가 대신할 수 없는 곳! ‘선돌’
약을 입에 털어넣으면서 독감 유행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숙소까지 예약하고 떠난 터라 여행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행의 목적은 겨울 동강을 오롯이 감상하는 것. 그리하여 계획대로 도착한 곳이 영월의 비경을 볼 수 있는 ‘선돌’이다.

선돌은 이름처럼 커다란 기암괴석이 우뚝 서 있는 명소다. 이곳이 더욱 반가웠던 것은 주차장에서 목적지까지 무척 가까웠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에 간들 대로에서 5분 남짓 투자해서 이런 비경을 만날 수 있을까. 독감에 취한 우리 가족에게는 축복과 같았다.

무엇보다 높이 70m에 달하는 기암괴석이 푸르른 서강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모습은 장관 그 자체다. 영월의 강줄기는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선돌에서는 기암괴석 사이로 하얗게 얼어붙은 강줄기를 시원하게 감상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특히 한쪽에 마련된 철봉 전망대는 사람들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인데, 막상 올라가면 오금이 저려서 금방 내려오기 일쑤다.

동시에 선돌은 아쉬운 공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시야에 담긴 감동을 고스란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암괴석 사이에 드넓게 펼쳐진 강줄기는, 역시 두 눈에 담아야 제맛이다. 시어머니도 선돌 앞에서는 경치에 잠시 넋을 놓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참, 신기하네.”

위치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373-1
문의 관광안내센터(1577-0545)

 

2얼음에 둘러 싸인 ‘한반도 지형’
선돌에서 불과 10분 남짓 지나자 우리는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영월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은 ‘한반도 지형’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한반도 지형을 감상하는 전망대’다. 언젠가부터 선암마을 인근 지형이 딱 우리나라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한반도 지형’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특징이 입소문 나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목적지까지는 탐방로가 두 개 있는데, 독감에 취한 우리에겐 마치 국토 순례처럼 길게 느껴졌다. 경사가 완만한 서강 길은 왕복 50분, 그 보다 짧은 샛길은 35분이 걸린다. 슬슬 독감에 취해가던 시어머니에게는 버거운 산책로다.

그때 시어머니의 손사래를 유심히 보던 관리소 할아버지가 슬며시 와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도로를 타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노점상이 대여섯 곳 있어요. 거기가 지름길인 옛길이에요. 여기 안내판에 점선으로 표기된 곳! 노인이나 아이들은 걷기가 힘드니까, 내가 일부러 알려주지!”

안내도를 살펴보니 정말 점선으로 표기된 ‘옛길’이 눈에 띄었다. 기쁜 마음에 차를 조금 몰아 언덕을 올랐더니 몇몇 노점상과 함께 ‘한반도 지형’ 입구 팻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곳에서 딱 10분 투자해서 그 유명하다는 한반도 지형을 눈에 품었다.

한반도 지형은 겨울에도 푸르렀다. 호랑이 지형을 푸른 송림이 가득 채운 덕분이다.삼면이 바다인 모양은 강줄기가, 동고서저의 지형은 키가 다른 송림이 대신하는 모습도 신기했다.

재미있는 건 눈이 얇게 쌓인 강줄기에 누군가 미스코리아의 영원한 소망인 ‘인류평화’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써놓은 것이다. 아마도 마을의 꼬맹이가 관광객을 대상으로 공개한 초기 작품인 듯했다.

위치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203
문의 관광안내센터(1577-0545)

 

3아, 단종! ‘청령포’
영월 하면 영화 <라디오 스타>가 떠오르지만, 사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종이다. 조선 시대 비운의 왕으로 꼽히는 단종은 인생 자체가 통곡의 나날이다. 어린 나위에 즉위했다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유배되었는데, 심지어 이곳에 머문 지 넉 달 만에 사약을 받았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였다.

청령포에 들어가면 이곳이 왜 유배지일수밖에 없는지 체감할 수 있다. 동·남·북 삼면은 물이요,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다. 섬 아닌 섬, 청령포가 딱 그렇다. 그 안에 감옥처럼 단종의 어소와 금표비가 덩그러니 있다. 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송림 사이에 길게 뻗은 관음송이다.

청령포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지만 부담은 없다. 배라고 해야 강원도 속초의 갯배 같은 모양새다. 사람이 있으면 떠났다가 돌아오는 식이다. 건너가는 시간은 30초나 될까. 시어머니는 배를 타고 나오면서 연방 혀를 찼다. “그 으린 게 을매나 불쌍하노.” 자신이 인생이 고된 탓에 남들의 슬픔은 몇 배로 흡수하는 시어머니는 마음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나 역시 아이를 키우다 보니 단종의 슬픔이 빛바랜 역사책의 일부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작은 섬에서 잠시 머물다 떠난 왕, 아니 누군가에겐 아들이었을 어린 청년의 슬픔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위치 영월군 영월읍 방절리 243-4
관람 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입장료 어른 2천, 원 청소년·어린이 1천200원
          (보호자를 동반한 6세 이하 무료)
문의 033-372-1240

 

4이 길을 걷는 맛! ‘요리 골목’
여행의 마지막은 영월읍 중심에 있는 요리 골목으로 잡았다. 이름은 요리 골목이지만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건물 사이에 자리한 벽화와 조형물, 아기자기한 간판 덕분이다. 언제 부터 인가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에 의해 전국 곳곳의 낙후된 동네가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탈바꿈되었는데, 영월의 요리 골목이 대표적인 사례다.

시작은 하늘로 치솟은 두 기둥에 영화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와 박중훈의 얼굴이 그려진 영월종합상가 건물이다. 파란 하늘에 두 배우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봤다면 건물 도로 맞은편 문구점을 끼고 들어가시라. 사람 체온마냥 따뜻한 작품들이 담벼락과 건물 벽면에 가득하다.

탄광에서 일하는 가장의 모습(옛날 영월은 탄광 채굴로 유명했다)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V’자를 그리는 남자아이가 해맑게 웃기도 한다. 인생의 시간이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도 있다.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아들, 어머니의 얼굴이다.

요리 골목 끝에는 대로와 이어진 청록다방(033-374-2126)이 있다. 맞다.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자주 나온 ‘그’ 시골 다방이다. 옛날식 소파가 있고 그 중앙에 난로가 있는, 어쩌면 쟁반보다 ‘오봉’이 어울릴 듯한 다방이다.

영화가 인기를 끈 뒤, 이곳은 외지인들에게 추억의 박물관으로 바뀐 듯했다. 그래서인지 손님은 토박이 할아버지들과 서울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이 반반이다. 우리 가족은 청록다방에서 추억을 마시지는 못했다.

“돈이 쌨다, 머 하라고 이런 데서 차를 마시나. 집에서 편하게 마시지?”

시어머니에겐 아직 추억을 마시는 것은, 호사스러운 사치에 가까웠다. 돌아오는 길, 우리 가족은 운전자를 제외하고 전멸하듯 잠에 취했다. 중간에 잠시 깨어 곁에서 주무시는 시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수많은 주름 사이에 독감과 여행의 피로가 가득 담겨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데 아들 내외와 여행에 끝까지 동행한, 지친 삶에서도 4 남매를 너끈히 키워낸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시어머니의 모습은 요리 골목의 벽화 속 어머니의 얼굴과도 꽤 닮았다.

위치 영월군 영월읍 요리 골목(농협 하나로마트 뒤편)
문의 관광안내센터(1577-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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