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문득 정광태의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가슴 탁 터지는 바다에서 뱃속부터 호탕한 웃음을 끄집어내고 싶어진다. ‘독도는 우리 땅.’ 그래, 우리 땅이다!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누나! 독도 TV 알아?”

아들이 어디서 보았는지 독도 TV 얘기를 한다.

“하루 종일 독도만 나오는 거야. 낮에도 밤에도.”

“밤에도 독도가 보여?”

“그냥 깜깜하지 뭐. 아무것도 안 보인대. 그런데 왜 독도 TV를 만들었지?”

“우리나라 땅이니까 지키려고 하는 거겠지. 누가 훔쳐 갈까 봐 항상 지켜보는 거지.”

“어떻게 훔쳐 가? 들고 갈 수가 있어? 독도를? 엄마는 독도에 가보셨어요? 저는 한번 가보고 싶어요.”

아이들의 대화에서 독도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가수 김장훈은 독도 콘서트를 하고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독도 홍보를 한다. 21세기 독도 수호천사들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 시대에도 이들 못지않은 독도 지킴이가 있었으니 ‘안용복’이라는 사람이다. 어부이자 수병이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담판 짓고 돌아온 민간외교가다. 오늘은 아이들과 안용복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너희 안용복이라는 사람 아니? 이름 들어본 적 있어?”

 

일본인과 담판을 짓던 ‘안용복’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의 사람이야. 지금 같은 봄철인 1693년 3월 20일, 동래 어민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지.”

안용복은 고기를 잡기 위해 침입한 일본 어민을 나무라다가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일본 호키주 태수 앞에 선 안용복은 “울릉도는 우리 영토다. 너희가 함부로 고기잡이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또 대마도주에게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며, 자신을 납치·구금한 부당성을 주장했다. 일본 막부에게서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조선 시대 일본과 내왕한 공식 외교문서)까지 받아냈으니 참으로 용기 있고 반듯하며 멋진 사람이다.

“훌륭해요. 그런데 안용복은 일본어를 잘했나 봐요?”

1828년 일본 역사가 오카지마 마사요시가 쓴 <죽도고>의 ‘오오야가 선인에 의한 조선인 연행’ 부분에 따르면 안용복은 부산 좌자천1리 14통 3호(현 부산 동구 좌천동)에 주소를 둔 ‘외거노비’라고 되어 있다. 얼굴은 검은데 검버섯이 돋았고 흉터는 없으며, 키는 4척 1촌(123㎝)으로 기록되었다. 키가 너무 작다. 아마도 옮겨 적는 과정에 숫자가 잘못 기록된 듯싶다.

아무튼 안용복이 살던 부산 동구 좌천동에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 무역이 유일하게 허용되던 ‘두무포왜관’이 있었다. 여기에서 안용복이 일본어를 배워 일본 관리들과 담판 지을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안용복이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으로 복무, 부산의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했다고도 전한다.

 

교활한 대마도주의 계략
“그런데,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가지고 오는 도중에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그 서계를 빼앗겼단다.”

“예? 어떡해요? 큰일났네. 그런데 왜 빼앗겼어요?”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음흉한 목적이 있었지. 그래서 문서를 위조해버렸단다. 오히려 안용복을 송환하고 조선 어민이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독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단다.”

안용복은 귀환 길에 서계를 뺏김은 물론, 50여 일을 갇혔다가 부산 왜관으로 옮겨져 또 40일 동안 구금되었다. 동래부사에게 인도된 뒤에도 승인 없이 월경(국경이나 경계선을 넘는 일)했다 하여 도리어 형벌을 받았다.

“아니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대요? 정말 나쁜 사람이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당시 조정은 이 일로 시끄러울 것을 싫어하는 무사주의 외교정책을 취했다. 독도로 인해 왜인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않은 계책이라 하며 ‘공도 정책’을 실시했다. 공도 정책은 섬을 비우는 것으로 변방의 작은 섬을 지키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그대로 두면 외적의 침략으로 주민이 피해를 보기에 실시하는 것이다. 북한과 대치하는 휴전선 부근에 주민이 살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일본에도 협조를 권하는 ‘예조복서’를 작성하여 동래의 일본 사신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에 울릉도가 우리의 영토임은 밝혀두었다.

“일이 그렇게 끝난 거예요? 좀 싱겁네.”

“아니지, 이듬해인 1694년 8월에 대마도주는 사신을 보내어 예조복서를 반환하면서 울릉도라는 말을 빼고 다시 작성해줄 것을 요청했단다.”

그보다 안용복 얘기를 더 해보자. 1696년 봄, 감옥에서 나온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돌아온 어부들에게서 일본 어부들이 행패를 부려 도저히 어업을 할 수 없다는 고충을 듣고 다시 울릉도로 향했다. 이번에도 일본 어선을 발견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안용복이 이번에는 아주 세게 나갔단다. 독도까지 일본 어선을 추격해 정박시킨 뒤 조선의 바다에 침범해 고기 잡은 사실을 문책했지. 울릉우산양도감세관(독도의 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범경(국경을 넘어 침범함)에 대해 항의하며 사과하라고 했지.”

“멋지네. 그래서요?”

“일본인들은 안용복의 당당한 모습과 직책에 놀랐지. 결국 독도와 울릉도는 조선 땅이라 인정하고, 일본인에게 울릉도와 독도로 가는 것을 금지했단다. 1697년 일본 막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확인하는 공식 통지를 보내 이후 철종 때까지 울릉도에 대한 양국 분쟁이 없었지.”

 

허위 직책을 사칭한 안용복?
“근사하다. 그런데 엄마,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 진짜 안용복의 직책이에요?”

“아니야, 안용복은 그냥 어부였어.”

“그럼 어떡해요? 큰일이네요?”

“조정에서는 안용복이 천민 신분으로 벼슬을 사칭하고 나라의 허락 없이 외국을 출입하여 국제 문제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압송해 사형을 논의했지.”

“헉! 그래서 안용복을 죽였어요?”

“아니, 죽이진 않았어. 신여철 남구만 등이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니 쌓은 죄와 공의이 서로 비슷하다’고 하여 귀양에 처해졌지. 그는 유배를 떠나며 ‘내 몸이 죽어서라도 우리 땅을 찾으려는 것이었는데, 귀양쯤이야 달게 받겠노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단다.”

“휴, 다행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독도는 언제부터 우리 땅이었어요?”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지증왕 13년 6월 여름 우산국이 귀복 … 복속되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512년에 우산국은 신라 하슬라주의 군주인 이사부의 군대가 정벌하면서 신라에 복속되었다. 문헌에 있는 우산도는 우산국의 일부고, 우산도는 독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독도는 512년부터 한국의 영토다. 참고로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동경 131°52′.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421번지에서 산75번지에 속한다. 울진군 죽변에서는 약 217km, 울릉도에서는 약 87km 떨어진 반면, 일본의 오키제도에서는 약 158km, 시마네현 히노미사키에서는 약 211km 떨어져 있다.

 

안용복의 유배는 정당한가?
울릉도 영역이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한 안용복은 일찍이 우리에게 영토 문제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역사적 인물이다. 현재 울릉도에는 안용복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충혼비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성묵아, 조정에서 안용복을 귀양 보낸 것을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안 되죠! 나라에서 하지 못한 일을 했으니 상을 줘도 모자라는 것 아닌가요? 조선 시대 조정은 바보 같아요.”

“소라는 어떻게 생각해?”

“음… 사실 안용복이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 건 맞아요. 그런데 관직을 사칭한 것은 좀… 그래요.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소 난감한 질문이다. “음… 엄마는 말이야….”

귓가로 철썩이는 독도의 바닷물과 갈매기의 소리가 들려와 말이 묻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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