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와 신재효의 고장 고창

 
고창읍성 성벽을 휘휘 감고 돌아가는 바람에는 구수한 육자배기 한 자락이 걸려 있고, 살포시 지르밟는 아낙네들의 발끝에는 북장단이 따라온다. 선운사 추녀 끝 풍경에서는 판소리 가락이 뚝뚝 떨어진다. 고창은 그런 고장이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고창읍성 동헌에 만들어진 재현 모형.
한적한 숲과 선운사
그리고 시 한 수에 취하다 
사람이건, 장소건 기억되는 이미지가 있다. 전라북도 고창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봄이면 끝없이 펼쳐지는 학원농장의 청보리밭? 논둑 밭둑에 처연히 누워 있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고인돌? 그도 아니면 연산군과 중신들이 짐승으로 분장한 광대를 목표물로 모의 사냥을 하던 영화 <왕의 남자> 속 대숲? 하지만 고창읍성은 영화 속 급박한 느낌과 다르게 고즈넉하다. 한적한 숲과 선운사 그리고 시 한 수가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엄마, 무슨 생각하세요?” “음… 시 한 수 되새기고 있지. 들어볼래?”

선운사 고랑으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삶의 애환에 젖은 애절한 음조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야. 미당 선생님의 고향이 바로 고창이거든. 그 분의 눈으로 본 고창을 음미하고 있었단다.” “그래요? 그런데 쉰 목소리로 노래하면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닌가요?”

판소리에서 목이 잔뜩 쉰 소리를 ‘수리성’이라 한다. 목을 많이 쓰면 쉬어서 거북한 소리가 나는데, 판소리에서는 이도 관록이 붙으면 거칠지만 구수한 맛이 배어난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질경이처럼 척박한 삶과 이야기가 유추되니 막걸리 집 아주머니의 걸쭉한 육자배기에 ‘탁배기’ 맛이 절로 났음이다.

 

소리가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상을 꿈꾸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육자배기 한 자락에 취해 걷다 보면, 저도 모르게 초가집 한 채 앞에 서 멈춰 선다. 판소리를 사랑한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다. 순조 12년에 태어난 신재효 선생의 집은 대대로 아전 집안이다. 신재효 선생 역시 아전이었다. 신재효 선생의 고택에서 5분 거리인 고창읍성으로 출퇴근했다.

“아빠, 아전이 뭐예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아전은 관청에서 일하는 계급이 낮은 관리야. TV 사극에서 이방, 형방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아전이지.”

신재효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제자백가어>에 능통했다. 1850년까지 열심히 가산을 모아 형편이 넉넉해지자 판소리에 몰두했다. 도연명이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오류 선생을 자처하며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삶을 꿈꾸었듯이, 신재효 선생은 동리(오동나무 마을)로 호를 삼았다. 오동나무는 거문고나 가야금을 만드는 재료니, 음악을 벗하며 살겠다는 뜻이다. 선생은 오동나무 마을에 앉아 소리가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상을 꿈꾼 것이다.

 

음악과 사람에 대한 진정성에 빛나다
신재효가 음악에 관심을 보이던 때는 동편제가 형성되던 시기다. 40대 초반부터 작고할 때까지 30여 년에 걸쳐 판소리 사설을 정리했다. 북에 정춘풍, 남에 신재효라 하여 판소리 이론가로 이름을 떨쳤고, 판소리 사설도 개작했다.

“고창에 신재효 처사는 집이 그리 가난하지 않고, 스스로 검소하고 담박하게 살아 고박하기가 마치 시골 노인 같습니다. 일찍이 여러 광대들을 불러 ‘모두 내게 오라’고 하여 글을 가르치고 그 음과 뜻을 바로잡으며, 천박하고 쌍스럽기가 심한 것은 고쳐서 수시로 익히게 하니, 이에 원근에서 배우려고 오는 자들이 나날이 문에 가득한데, 그들을 모두 집에서 재우고 먹이니 항상 음악 소리가 흘러나와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깁니다.”

신재효의 행적과 사람됨을 보여주는 김해부사 정현석의 편지글이다.

“신재효란 분은 정말 음악을 사랑하셨나 봐요.”

“그렇지, 그런데 세상은 그분에 대해 한쪽 면만 전하는 것 같아.”

신재효는 ‘제각각으로 불리던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가루지기타령> 등의 가사를 정리하여 여섯 마당으로 체계화한 사람’이라는 점만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여기에 ‘플러스알파’가 있다. ‘1876년(고종 13) 기민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되고 호조참판으로 중추부동지사를 겸직하였다’는 것이다. 즉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한 사람, 세상이 알아줄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음악을 사랑한 사람, 나아가 광대소리와 구전문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해 판소리로 승화시킨 인물일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을 품은 인간 신재효에 관한 것이다. 그의 가슴에선 사랑과 뜨거움이 넘쳐났고, 이것이 판소리를 통해 형상화되었을 뿐이다. 하여 신재효 선생을 떠올리면 그의 가슴에서 나오는 판소리 한 소절이 고창 땅을 넘어 한반도 구석구석까지 넘실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신재효 선생이 출퇴근하던 고창읍성.
한 바퀴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면 무병장수
문득 그가 살던 시대가 궁금해지니 고창읍성으로 발길이 닿는다. 신재효 선생이 출퇴근하던 고창읍성은 1450년부터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3년 동안 축성했다. 호남 내륙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고창읍성은 모양성으로도 불린다. 고창의 백제 때 속명이 모양현으로 ‘모(牟)’는 보리를 뜻하고 ‘양(陽)’은 태양을 뜻하니, 햇살 담뿍 받은 보리가 자라는 보리고을이라는 뜻이다. 고창이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어? 엄마, 저기 누가 있어요!” 신재효 선생이 아전으로 일하던 고창읍성 동헌에는 당시처럼 사또와 곁에 부복한 아전들이 서 있다. 또 옆 정자에서 양반님네들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리를 한 자락씩 하고 있다. 신재효 선생이 살던 시절의 풍광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그 곁으로 아주머니들이 돌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지나간다.

“얘들아, 여기 고창읍성에는 독특한 풍습이 있는데 알고 있니?”

고창 풍천장어와 복분자주.
“뭐예요? 궁금해요.”

고창읍성의 독특한 풍습은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것이다.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 한다고. 특히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 그 중에서도 윤삼월에 해야 효험이 제일 좋다 하여 답성 놀이가 절정을 이뤘다. 성을 돈 뒤 머리에 인 돌은 성안의 지정된 장소에 놓고 나왔는데, 이것은 왜구들이 침략했을 때 무기로 사용되었다. 성 밟기 행사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돌을 비축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참 지혜롭게 산 것 같아요. 운동도 되고, 전쟁 무기도 비축하고요.”

“그러네, 그냥 돌을 나르라고 하면 참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며 걷다 보니 아낙들이 부르는 소리는 신재효 고택에서 선생께 배우던 바로 그 판소리다. 존경의 눈빛으로 선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만치 모여 있고, 그 사이로 사라지는 신재효 선생의 뒷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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