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다산초당&백련사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다 보니 마흔이 훌쩍 넘었다. 불혹…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으며 사는지 문득 돌아본다. 마흔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던 나이다. 세상을 한껏 내달릴 나이에 시작된 유배생활 18년. 그는 그곳에서 어떠한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그에게서 삶의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이동미(여행작가)

 

 

정약용이 유배된 전라도 강진은 싱그러운 초록이 뽐내는 신록의 계절로 내달리고 있다. 모든 것이 싱그럽다. 하지만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온 때는 1801년 겨울이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함이 불혹의 다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강진 사람들은 정약용을 유배 온 죄인이라 하여 멀리했다. 오갈 데 없는 그를 불쌍히 여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작은 방 한 칸을 내어주었다. 다산은 그 방을 ‘사의재’라 이름 지었다. ‘생각을 맑게 하고 용모는 엄숙하게 하고 말을 삼가 과묵해야 하며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아전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4년간 다산이 머무르던 사의재는 여러 문헌과 고증을 통해 2007년 5월 복원· 공개되었다. 주막으로 쓰던 건물과 다산이 머무르던 방, 작은 연못과 우물이 있다. 1805년 다산은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고성사 내 칠성각)으로 거처를 옮겨 9개월 동안 머물렀다. 다음해 그의 제자인 학래 이청의 집에 기거하다가 1808년에 다산초당으로 또다시 거처를 옮겼다.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전라도 강진
다산초당이 자리한 만덕산은 예부터 차가 많아 다산이라고 불렸다. 차를 워낙 좋아하던 정약용은 자신의 호도 뒷산의 이름을 따라 다산이라 했다. 만덕산이 뒤에서 포근히 안아주고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뵈는 이곳에서 다산은 뒷담 밑 약천의 석간수를 떠다가 앞뜰에서 차를 달였다.

“여기가 다산초당이야. 강진 유배 기간 18년 중 여기에서 11년을 머무르셨단다.”

“여기에 유배된 정약용이, 수원화성 지을 때 거중기를 사용한 그분이에요?”

“그렇지.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쌓을 때 정약용 선생님이 등장하지. 처음으로 유형거와 거중기를 도입해 비용을 절약하고 성을 쌓는 기간을 대폭 줄이고, 그때까지 쌓은 성 중에 가장 훌륭하고 튼튼한 성을 완성하셨단다. 한마디로 멋진 분이지.”

“왜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유배 보냈어요?”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하다. 그래도 다산초당 툇마루에 앉아 당시 상황을 되짚어가며 조곤조곤 설명해본다. 정약용은 유배를 갈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당시는 당쟁이 극에 달한 시대다. 학식이 높고 반듯하며,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게 대하며, 백성의 아픔을 보살펴 사방에서 존경을 받으며, 정조대왕의 총애까지 쏟아지는 정약용이 반대파의 눈에 고울 리 없다.

 

주홍글씨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던
‘천주학쟁이’

그때 정약용은 천주학에 관심이 있었고, 이것이 반대파에게 빌미가 되었다. 다산은 양반이든 상민이든 모두 평등하다는 천주학을 받아들여 세례까지 받았다. 하지만 당시 천주학은 유교에 반하는 부분  때문에 공인하지 못하는 상태로 금하고 있었으니, 어떤 트집이라도 잡으려 애쓰던 반대파에게 좋은 빌미가 된 것이다.

결국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으로 2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거나 옥에 갇히는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나고, 이를 중국에 알려 도움을 청하려다 발각되는 ‘황사영 백서’까지 발생한다. 황사영이 정약전의 조카사위이므로 정약용·정약전 형제는 사형을 당하기 위해 서울로 끌려간다. 하지만 곡산 사람들의 진정서와 정약용을 죽이면 안 된다는 여러 사람들의 탄원으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 길에 오른 것이다. 

“휴~ 다행이다. 그런데 왜 곡산 사람들이 탄원서를 냈어요? 무슨 관계가 있어요?”

정약용은 36세(1797년)에 곡산부사로 부임했다. 비단 역대 곡산현감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세금으로 베를 거둘 때는 긴 자를 쓰고, 조정에 보낼 때는 짧은 자를 써서 남은 베는 전임사또 맘대로 쓰는 등 횡포가 심했다.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꾸미고, 어린아이를 청년으로 만들고, 노인의 나이를 줄여가며 백성에게 힘든 부역을 시켰다. 부역에 못 나가면 돈이나 쌀로 대신 세금을 물렸으니 백성의 고통은 상당했다. 이에 정약용은 베를 거둘 때나 나라에 바칠 때 같은 자를 썼고, 애매한 일은 백성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했다. 곡산 사람들이 정약용의 구명 운동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성의 마음을 헤아린 진정한 목민관
정약용은 누구보다 백성의 궁핍한 삶을 잘 알았다. 6세부터 31세까지 부친이 현감 군수 부사 목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할 때 임지를 따라다니며 견문을 넓혔고, 조정에 입문해서는 예문관 검열로 일했다. 33세 때는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출행하여 지방행정의 문란과 부패에 따른 민생의 궁핍상을 직접 목격한데다, 찰방 부사의 목민관을 거치면서 백성의 고통을 만났기 때문이다. 물론 곡산부사 시절도 포함된다.

이를 바탕으로 정약용은 강진 유배 중에 <목민심서>를 지었으니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목민’, 마음에 새겨두는 글이라 ‘심서’라 했다. 백성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목민관이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그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리기 위함이었으니 요즘 말로 하면 ‘공무원 지침서’다.

“그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지으셨나요?”

“그렇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권이 넘는 저서가 이곳에서 탄생했단다.” “헉! 500권? 그게 가능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유배지에서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사람
실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다산이 강진에 내려온 것이 1801년이고, 귀양살이에서 해제된 것이 1818년이다. 그동안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끌어내어 책을 썼다. 정치와 경제, 법률과 군사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세상에 하고픈 말을 글로 옮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경세유표>로 56세(1817년)때 완성되었다. <대학회의> <맹자요의> <민보의> 등도 썼다. <목민심서>가 완성되던 해인 1818년 8월, 18년의 귀양살이가 끝나고 고향인 마현마을로 돌아가 이듬해  <흠흠신서> 30권을 썼다. 이렇게 그가 일생에 쓴 책은 500권이 넘고, 지은 시는 2천460여 편이다.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강진 유배기간이 관리로서 정약용에게는 암흑기지만, 학자로서 정약용에게는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한 시기다.

“자 , 이제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을 걸어볼까?”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향하는 1km 남짓한오솔길은 참으로 좋다. 이 길을 걸으며 다산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고, 삶의 의욕을 북돋우고  혜장스님과 교류했다. 혜장스님은 다산보다 열살이 어렸지만 , 혜장과 교우를 통해 다산은 다도의 경지를 익혔고 이후 유배 생활을 감내하는 데 소중한 동반자가 되었다. 반면에 혜장은 다산에게서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다.

오솔길은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이어진다.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나무뿌리가 겉으로 드러나 어떤 것은 사람의 발길에 반질반질 윤이 나고, 또 어떤 것은 예술가의 설치 작품처럼 독특한 모양이다. 그 길을 걸으면 동백꽃 군락으로 이름난 백련사에 도착한다.

다산은 차뿐만 아니라 동백꽃 또한 좋아해 초당 옆에 심었다. 붉고 만개한 동백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 목이 잘리는 것 같아 유배 중인 사람들은 대개 동백꽃을 싫어했는데 정약용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저것만 바라지 말고, 이것도 누려보자
아이들과 한껏 목을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초록이 물든 나뭇잎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허공을 쥐었다 놓아도 푸른 물이 떨어질 것 같은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 혜장선사와 거닐던 오솔길, 이따금씩 내려다보던 강진만…. 그곳을 둘러보며 다산이 쓴 산문 구절을 되새긴다. 

“얘들아, 이 글 한 번 볼래?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지은 산문 중의 일부야. 물론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먼 훗날, 너희가 엄마 아빠 나이가 되었을 때쯤이면 이해가 될 거야. 같이 읽어볼까?”

지구는 둥글고 사방의 땅은 평평하다. 그러니 내가 있는 곳보다  높은 곳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곤륜산이나 형산, 곽산을 오르며 높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지나간 과거는 쫓아가 잡을 수 없고, 다가올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지금 이 상황보다 즐거운 때는 없다. 그런데도 좋은 수레를 갈망하고 논밭에 마음 태우며 기쁨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땀을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평생토록 헤매면서 오로지 저것을 바랄 뿐, 이것을 참으로 누려야 하는 줄 모른 지가 오래되었다.

-다산의 산문 ‘바로 이(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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