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뒷길은 시내에서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번잡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문화의 향과 깊이가 배어 있다. 도심 속 아름다운 사찰 길상사와 만해 한용운의 숨결이 느껴지는 심우장, 고즈넉한 최순우 옛집 등 한나절을 걷다 보면 진정한 풍요로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충만함이 몸과 마음으로 스며든다.취재·사진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일러스트 김희정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한번쯤 읽어봤을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물질문명에 파괴되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했다. 성북동은 재벌가의 저택이 많아 질투가 나는 동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뒷길에는 아직도 오래된 건축물과 문화재, 사람냄새 나는 다정한 골목길이 많다. ‘비둘기길’도 있다.

 

한성대역 5번 출구에서 만나!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5번 출구에서 출발한 성북동길 걷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이 동네서 유명한 ‘안동할매 청국장집’(02-743-8104)에서 시작했다. 각종 나물에 오이소박이, 양배추쌈과 생두부, 생선조림… 그야말로 원조 ‘집 밥’이다. 반찬은 무한 리필, 이것이 진정한 한국의 정이거니.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여유롭게 걷다가 평범한 골목길에 위치한 ‘최순우 옛집(02-3675-3401)’에 들어섰다. 마치 작은아버지 댁을 방문한 듯 친근한 기분이 든다. 서울의 복잡하고 바쁜 생활과 완전히 차단된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음이 저절로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는 이곳에 머무르며 한국미에 관해 주옥같은 글을 썼다.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산실이다. 경기 지역의 한옥 형태로, 안채와 정원으로 연결된 바깥채는 보이는 듯 감춰진 은근한 조형미가 매력적이다. 

친필 현판과 직접 모은 소장품들, 마당의 나무와 석물은 그의 안목과 생활의 멋을 보여주고, 당시 문화계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을 법하다. 뒤뜰의 반질반질한 툇마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하다.

돌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를 마실 수도 있다. 시민들의 기부와 후원으로 보전된 장소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머물며 자세한 안내를 해주는데 ,문화 행사로 뜰에서 봄밤의 시 낭송회와 음악회도 열린다고 한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11월까지 개방, 일요일은 휴관이다.

 

연 2회, 5월이 기회인 간송미술관
최순우 옛집을 구경하고 길을 건너 성북초등학교옆 ‘간송미술관’(02-762-2645)으로 이동했다. 미술관 건물은 단출하고 허름해 보이지만 미술관을 감싸고 있는 주변의 숲과 적막함은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은 일본이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을 펼칠 때 문화와 유물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문화재를 수집한 분이다. 훈민정음을 비롯한 국보급 문화재 12점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은 5월과 10월 두 차례 전시회 때만 일반에 개방하기 때문에 전시회 일자를 확인하고 방문해야 한다. 앞뜰을 둘러보니 간송의 흉상을 비롯해 석탑 석불 동물석상이 간간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함박꽃나무 영춘화 모란 작약 금낭화 등이 어우러져 있고 한쪽에는 순백의 공작들이 날개를 펴고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고요 속의 그 황홀함이라니….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미술관의 정원은 잠시의 휴식일지언정 도시인의 지친 감성을 정화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님의 침묵’이 흐르는 심우장
대사관로를 따라 걷다가 1960년대를 연상시키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철대문을 한 ‘심우장’이 보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잠시 쉬면서 심우장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본다. 심우장이란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에서 유래한 것이다. 심우는 선종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다.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안타깝게도 광복을 목전에 두고 이 집에서 눈을 감았다.

심우장에는 만해의 글씨, 연구 논문집, 옥중 공판 기록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한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이다. 심우장은 만해가 삼일운동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거처가 없을 때 주위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단출한 일자형 한옥으로 북향이다.

통 남향으로 집을 짓는데 심우장은 남쪽에 위치한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북쪽으로 지었다고 한다.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만해가 직접 심은 것이는데, 외국인 관광객도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는 것을 보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문향과 다향이 넘치는 수연산방으로
심우장을 보고 내려오는 길, 약간 지치기도 하고 차 한 잔이 생각나서 찾은 곳은 ‘수연산방’으로 알려진 ‘이태준가’(서울시 민속자료 11호)다. 자그마한 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감탄하는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수연산방은 예전에는 ‘이태현 가옥’으로 불렸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보존 가치가 있었지만, 월북 작가 이태준의 이름은 감춰졌다. 1988년 월북 작가들이 해금 조치되면서 이태준가는 본래의 이름을 찾았다. 상허 이태준은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이 소속된 구인회의 창설 멤버다. 예약 해둔 별채인 구인회 카페(02-746-1736)는 통창으로 되어 있어 풍광이 기가 막히다.  구인회 멤버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문학의 향취 또한 가득하다. 벽 한 쪽에 마련된 책꽂이에서 이태준의 유명한 <문장강화>도 펼쳐보고 백석의 시집도 읽어본다.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수연산방에서 지낸 상허는 ‘달밤’ ‘복덕방’ ‘영월영감’ ‘까마귀’ 등의 명문을 집필했고, <무서록>을 통해 담백한 문체로 성북동 생활을 담은 글을 적었을 것이다.

구인회 멤버들에게 수연산방은 예술적 교감을 주고받는 창작의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태준의 문학적 자산은 물론이고 정지용과 이상, 김유정의 자취도 배어 있을 터다. 당대 문인들의 문향과 다향이 어우러진  수연산방의 존재가 귀하고 감사하다. 정성이 가득한 전통 차의 가격은 1만 원 내외로 다소 비싸지만, 그만큼 호사를 누릴 가치는 충분했다.

 

그대 아름다운 강물로 흐르라
성북동 성당을 지나 ‘길상사’로 향한다. 깊은 산속의 천년 고찰에 비해 길상사는 동자승처럼 어리고 맑은 느낌이다. 일주문을 지날 때 무서운 표정을 한 사천왕상이 없고 ,뜰에 세워진 관세음보살상도 성모마리아를 연상시킨다. 설명을 읽어보니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화가가 봉안한 석상으로,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보살상이라 한다. 법당에 들어서면 탱화도 오방색을 쓰지 않았고, 기둥과 서까래엔 오색단청 없이 수수하다. 3공화국 시절 고급 요정 ‘대원각’을 ‘마담’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1987년 1천억 원대에 달하는 부지와 건물을 법정스님께 시주하면서 길상사를 지었다. 길상사의 이름은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따와 지었다.

월북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지기도 한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고 한다. 무소유를 완성한 법정스님의 삶과 길상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다시 성북동길을 천천히 내려온다. 성북동의 길에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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