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이면 경춘선이 유혹한다. 기차를 타고 가는 여유로운 춘천 여행엔 뭔가 특별한 것이 기다릴 것만 같으니 그중 춘천 닭갈비도 한몫한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 시간이 익어가고, 침샘에 추억이 각인된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선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학창 시절 동아리 활동이 끝나면 자연스레 뒤풀이가 이어져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나면 여자 선배라고 후배들 몇이 따라 일어서며 밤길을 동행해주었다. 그것이 고맙다고 집 근처 닭갈비 집에서 또 한 차례.
어느 날 그렇게 또다시 닭갈비 집에 자리를 잡았는데, 불현듯 지갑에 돈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확인해보니 정말 동전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취방으로 달려가 용돈이며 생활비를 넣어놓은 깡통까지 살피던 순간, 아찔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다음에 드리겠다 말할 주변머리도 없던 어린 시절, 어떡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 책 더미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 순간… 떨어진 책 사이로 삐죽이 머리를 내민 배춧잎 한 장! 내 생에 1만 원짜리 한 장이 그렇게 고마웠던 적이 또 있을까. 그것을 꼭 쥐고 돌아와 후배들에게 닭갈비와 소주, 음료수를 사주었다.
그날따라 분위기는 더욱 좋았지만 자리가 파할 때까지 노심초사했으니 아슬아슬 동전 몇 개를 거스름돈으로 받았다. 당시 닭갈비 1대가 600원이고, 한 사람당 3대쯤이 기본이었다. 언제부턴가 닭갈비의 주문 단위가 1인분 2인분 하는 식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1인분이 1만 원쯤 한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닭갈비
그렇게 닭갈비의 추억이 짠하기에 춘천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일부러 들러 닭갈비를 먹고, 포장해서 가져오고 때로는 택배로 배달해 먹기도 한다. 최고의 맛은 역시 춘천에서 먹는 닭갈비다.
춘천의 닭갈비 골목 중 원조는 명동 쪽이다. 춘천 중앙부에 있는 가장 번화한 골목이 명동으로, 배용준과 최지우를 한류 주역으로 만든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최지우는 명동 골목에서 하염없이 배용준을 기다리고, 배용준은 사고가 나서 오지 못하는 애달픈 장면이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되었다. 그 명동 뒷골목에 좌우로 늘어선 게 모두 닭갈비 집이다. 지글지글 맛있는 냄새가 골목을 휘감고 있다.
왁자지껄 닭갈비 집에 발을 들이면 동그란 철반이 반긴다. 두께가 1cm 정도 되는 주물 철판으로, 이것이 닭갈비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비결이다. 속까지 고루 익으면서 타지 않고 노릇노릇 먹음직스런 색을 낸다. 주문을 하면 얼음 동동 뜬 물김치가 먼저 나온다. 뼛속까지 시원한 동치미 한 숟가락을 떠서 목을 축이면 뱃속에서는 닭갈비를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끝난다.
이윽고 기름 둘러 뜨겁게 단 주물 철판에 지지직 소리를 내며 양념한 닭갈비와 채소가 얹어지니 군침이 절로 넘어간다. 참지 못해 젓가락을 내미니 먹을 수 있는 건 양배추뿐! 한쪽은 뜨겁고 한쪽은 차가운 양배추를 씹는다. ‘참고 기다리라’는 핀잔을 들으면서 말이다.
닭갈비가 익어가면 분위기도 익어간다. 중간중간 달려와 도끼처럼 생긴 도구로 현란한 손놀림을 자랑하며 닭갈비를 이리저리 뒤집어 골고루 익혀주는 종업원의 퍼포먼스는 분위기를 고조한다. 슬슬 고구마를 찔러본다. 고구마가 익으면 닭갈비도 익었다는 의미다. 이제 매콤하고 쫄깃한 닭갈비를 상추에 올려놓고 동그랗게 싸서 한 입 가득 베어 물면 저도 몰래 신음(?)이 흘러나온다. 양념이 잘 밴 닭고기, 부드러운 양배추, 파삭하면서도 달착지근한 고구마와 쫄깃쫄깃 매콤한 떡, 얼음 동동 물김치가 펼치는 닭갈비의 향연은 행복의 도가니다. 손과 입에 양념을 잔뜩 묻히며 짜장면보다 신나게 먹어대는 아이들도 함박웃음이다.
계륵은 먹을 것이 없다?
닭갈비, 한자로 표현하면 계륵(鷄肋)이다.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의 갈비란 뜻으로 ‘계륵’이란 단어를 쓴다. 왜일까? 중국의 위나라 조조는 촉나라 유비와 한중(漢中) 땅을 놓고 싸우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쓸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기는 아깝다며 한중 땅을 계륵이라 했다. 결국 조조는 이틀 뒤 철수 명령을 내렸고, 한중 땅은 유비의 손에 들어갔다.
계륵은 정말 먹을 것이 없을까? 그건 춘천 닭갈비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닭갈비를 들고 뼈 사이에 붙어 있는 살과 양념을 쪽쪽 빨아 먹는 맛이 일품이다. 이리저리 발라 먹는 즐거움을 조조는 왜 몰랐을까? 천하의 조조도 몰랐던 맛을 알고 있음에 어깨가 우쭐해진다.
사실 닭갈비가 반드시 닭의 갈비는 아니다. 조그만 닭의 갈비만 추린다면 그 양이 얼마나 될까. 가슴살 부위나 다리 살을 돼지갈비처럼 토막 내서 양념한 뒤 구워 먹기 때문에 닭갈비라 부르는 것이다. 해서 예전에는 뼈를 들고 뜯어 먹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뼈 없는 닭갈비가 등장했다. 뼈가 없으니 먹기가 훨씬 수월하지만 스틱 자동차가 오토로 바뀐 느낌이랄까? 허전했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다. 금세 적응되어 이제는 뼈를 발라 먹는 것이 귀찮고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닭은 인류의 동반자이자 구원자
그러고 보니 필자는 닭띠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닭과 운명적인 인연이 정해졌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동물 중에서 닭을 가장 먼저 익혔고, 닭이 지나가면 한 번 더 보았으며, 닭 요리에 관심이 남달랐던 것 같다. 동기 모임에서도 닭 요리는 빼 놓을 수 없는 추억이니 닭갈비에 소주를 곁들이며 ‘우리는 지금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고 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자기는 정확히 알고 있다’ 등 갑론을박했다. 그도 저도 지치면 ‘닭 요리 하나씩 대기’ 놀이를 했으니 닭강정 닭계장 닭꼬치 닭볶음탕 닭죽 닭칼국수 초계탕 닭갈비 찜닭 라조기…. 도대체 닭 요리로 못 하는 게 뭐냐고 투덜대다 먼저 쓰러진 친구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닭 요리를 읊어댔다.
닭갈비의 유래는 신라 시대, 1천400년 전 닭갈비와 유사한 음식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아쉽게도 증빙할 만한 자료가 없다.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라도 닭고기가 사랑받지 않는 곳이 없으니 역설적이지만 닭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걱정도 해본다.
100원이 1만 원이 된 유서 깊은 골목
춘천 닭갈비 골목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현재 닭갈비골목은 명동 뒷골목 말고도 강원대학교 후문, 후평동, 애마골 등 여러 곳에 널리 분포하지만 원조는 명동 뒷골목이다. 1960년대 말에는 돼지고기 구하기가 어려웠다. 닭고기를 돼지갈비처럼 토막 내고 양념해 닭불고기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한다.
허름한 식당의 사이드 메뉴였으나 인기를 얻어 주 메뉴 자리를 꿰차고, 나아가 오로지 닭갈비만 파는 집을 탄생시켰다. 1970년대에는 닭갈비 골목까지 형성되었다. 당시 닭갈비 1대 값이 100원 정도로 저렴해 휴가 나온 군인이나 대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하여 ‘대학생 갈비’ ‘서민 갈비’로 불리기도 했다. 춘전 지역에 양축업이 성했고 도계장이 많아 원재료가 풍부하고, 유통 마진이 적어 저렴한 가격에 공급이 가능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석쇠와 숯불은 지금의 주물 철판이 되었고 한 대에 100원이던 닭갈비는 1인분 (300g)에 1만 원 정도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흘렀나 보다. 닭갈비에 채소와 고구마, 떡 등 부재료가 더해지고 사리를 추가하거나 밥을 볶아 먹는 코스 형식이 되었다. 요즘은 닭갈비 집에 따라 밥을 볶아달라 하면 예쁜 모양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연인들에게는 하트 모양, 가족에겐 별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김 가루를 잔뜩 뿌려 제과점 케이크보다 예쁜 닭갈비 볶음밥 케이크를 만들어주니 손뼉 치며 환호하게 된다. 여기에 현란한 주인의 손놀림이 더해지면 일류 철판 요리 전문점에 와 있는 양 착각하게 된다.
만족스런 얼굴로 나서는 춘천 명동 거리에는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인공처럼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간다. 주말이면 생각도 못 한 즉석 공연과 연주가 펼쳐지니, 정말 사랑스런 춘천 닭갈비 골목이다. 이 정도라면 ‘춘천=닭갈비’라는 공식에 고개를 끄덕이고 ‘춘천에 가면 닭갈비를 먹고 와야 한다’는 불문율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으니, 눈앞으로 지글지글 닭갈비가 어른거린다. 시원한 막국수도 떠오른다. 참을 수가 없다. 당장 시동을 걸고 춘천으로 내달아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