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미학’이라는 카페에서 만났지만, 그녀는 커피를 주문할 수 없었다. “요구르트주스로 할까? 사실 여기는 이름처럼 커피가 참 맛있는 곳이에요.” 커피가 맛있는 곳이라면서 억울한 기색 없이 메뉴의 바깥쪽을 열심히 살폈다. 김여진은 모유 수유 중이다. “빨리 이야기 마치고 가야 해요. 딱 한 시간 정도 괜찮아요. 유축 해놓은 게 있긴 한데, 아기가 젖병은 잘 안 빨아서요.” 어렵게 만난 인터뷰이를 한 시간 만에 보내야 한다. 커피미학에서 커피를 주문할 수 없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지만, 한 생명이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이야기를 서둘렀다. 

글 이재영(자유기고가) 사진 김영선

 

 

진작에 알았다, 배우만 해서 행복한 사람이 아님을
“2011년은 저에게 정말 드라마틱한 해였어요.”

트위터를 통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낀 사회문제를 전하면서 소셜테이너라 불리고, 세상과 소통하던 중에 생명을 잉태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잊고 싶지 않았어요. 세심하게 기억에 남기고 싶었어요. 기억이라는 건 지나면서 뭉뚱그려지잖아요. 그걸 세밀한 글로 선명하게 남기고 싶었죠.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임신을 해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니까 뭐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 책을 쓰기 시작했죠.”

바쁜 시절이었다.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2011년이 아니었나.

김진숙씨는 여전히 크레인 위에 있었고, 홍대 청소 노동자들 또한 현재 진행형이었으며, 청춘들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 속에서 김여진(40)씨는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했고, 그것을 잊고 싶지 않아 꾸준히 기록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소셜테이너라 부르며 ‘사용’했고, 그녀는 기꺼이 쓰였다.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고, 듣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배우가 아닌 인간 김여진으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말하자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순간이니까.

“저는 배우만 해서 행복한 사람이 아니에요. 진작에 알았어요. 물론 배우라는 직업은 굉장히 좋은 직업이에요. 그러나 그것만 해서는 인생이 허공에 떠다녀요. 인기를 얻고, 시선을 받고, 다른 캐릭터에 몰입하고, 행복하죠. 그런 것들은 어느 시기가 지나면 끝이거든요. 그땐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일상의 삶이 참 허망해요.

허탈하고 재미가 없죠. 자꾸 남을 의식하고, 시선을 더 많이 받고 싶고. 사람 김여진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봉사 활동도 시작했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죠. 직장인이 취미 생활을 하고 전혀 다른 일에 시간을 보내듯, 똑같아요.”

 

연애는 자기 성찰, 사랑해봐야 안다
그런데 임신을 했다. 처음에는 몸이 아파 입원을 준비했다. 너무 바쁘게 살아서 그런다 보다, 피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득 오늘이 며칠이지 싶었다. 날짜를 세고 테스트해보니 임신이었다. 몸이 가라앉고 힘들었다. 읽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듣던 음악도 귀 기울여지지 않았다. 입덧은 임신 후 5개월까지 계속됐다. 그래도 새로 시작된 이 연애가 참 좋았다. 입덧이 잦아들 때쯤 그녀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말 단순한 기록이 아닌 독자에게 연애를 거는 심정으로 찬찬히 지금까지 자신의 연애담을 써 내려 갔다. 책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을 사랑해봐야 안다. 내가 무엇에 끌리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얼마나 찌질하고 잔인한지, 얼마나 자주 작은 일에 상처 받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연애해봐야 안다. 그게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해보면 해볼수록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연애만큼 매 순간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도 없으므로.”   - 김여진 에세이 <연애> 중

분명히 남의 연애 이야기건만, 책을 읽은 누군가는 가슴이 먹먹했다 하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때론 아프고 때론 기뻤던 김여진의 연애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연애를 통한 한 사람의 성찰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뜻한 문장 속의 열렬한 삶은 지금도 그렇게 한 명 두 명 사람들에게 연애를 걸고 있다. 그리고 김여진은 또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바로 백일이 지난 그의 아들 준과 나누는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리한 일방적 연애
“이제껏 해온 연애와는 차원이 달라요. 정말 불리한 연애죠. 아주 일방적이지만 정말 행복한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있어요. 아무리 품어도 날 밀쳐내지 않잖아요. ‘밀당’할 필요 없고, 피곤하지 않고 사랑이 충만한 연애예요.”

아무리 퍼주어도 손해 본 것 같지 않은 편하고 풍족한 느낌이라고 했다. 내 사정이나 생활이 전혀 고려되지 않지만, 흔쾌히 마음을 열고 헌신하는 연애. 막연하게 미루어 짐작하던 아가페적인 사랑을 제대로 알게 된 느낌. 김여진은 이제야 왜 그동안 남자와 연애에서 집착하고 다 주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모성애, 여자들의 그 특별한 사랑이 남자와 연애할 때도 작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지금 같아선 앞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정신없어요. 늘 대기 상태에 쪽잠을 자야  하는 시기잖아요. 그래도 행복해요. 멘토인 법륜스님께서 그러시더라구요. 평생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90%를 3년 안에 해주라고요. 태어나고 3년간 사랑을 듬뿍 줘서 아이에게 세상이 사랑이라고 알려주라고요. 머릿속에 사랑이 각인되면 엄마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생기고, 나머지 인생도 즐거울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려구요. 엄마가 정말 필요한 시기에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나의 아이에게 주고 싶은 작은 방과 자유
에세이 <연애>에서 밝혔듯 모범생이던 그녀는 경쟁이 전부인 줄 믿고 행복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시험문제 하나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괴로운 학창 시절, 시험 스트레스만 없으면 재미있게 공부할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미래의 나의 아이에게 쓴 편지가 있어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해요. ‘나는 네가 뭘 하든 널 응원할 거야.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너를 지지할 거야. 그리고 네가 스무 살이 되면 작은 방과 자유를 줄 거야.’라고 썼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꼭 되고 싶은 삶을 쓴 거죠.”

김여진은 학창 시절 억눌린 삶이 너무 괴로워서 미래의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쓴 내용처럼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 기억을 가지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하고 싶은 것이 불리한 연애를 시작하며 품는 작은 바람이라고 했다.

그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연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치정이든, 사랑이든 후유증을 감당할 수 있다면 해도 좋다는 쪽이다. 달콤한 걸 먹으면 반드시 살이 찌듯, 쾌락을 추구하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있다. 그걸 생각해보고 감당할 수 있으면 된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다. 배우만으로 행복하지 않아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이야기며 소셜테이너라 불렸다.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그냥 받아들였다. 자신이 한 일의 당연한 결과니까. “그 결과가 겁나서 아무것도 못 하는 삶은 재미없어요. 살찔까 봐 아무것도 못 먹으면 얼마나 퍽퍽해요. 가끔 맛있는 것도 먹고, 찌면 운동해서 빼면 되는 것처럼 원하는 걸 하고 살면 좋겠어요. 지탄하면 받고, 다른 거 하고 싶은 거 또 하고 그렇게 사는 게 훨씬 풍부한 삶인 것 같아요.”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씨는 정확히 309일 만에 땅에 발을 디뎠다. 그가 허공에 떠 있는 사이 연기라는 무중력의 세계에 살던 여배우가 땅 위에 서서 세상에 연애를 걸었다. 김진숙씨에게, 홍대 청소 노동자에게, 반값 등록금을 애타게 기다리는 안쓰러운 청춘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외면하려 한 우리에게… 세상에 연애를 걸고, 새로운 연애를 받아들인 2011년처럼 앞으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연애할 것이다. 언제나 행복한 ‘사람’ 김여진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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