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잉카의 수도 쿠스코(Cusco)와 삭사이와만(Sacsayhuaman) 요새, 신비의 미로 켄코(Quenqo), 농사법 연구소 모라이(Moray), 산속의 염전 살리나스(Salinas)를 차례로 소개해드렸는데요. 잉카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계신가요? 이번엔 잉카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성스러운 계곡’이라는 뜻이 있는 가진 우루밤바(Urubamba) 강을 따라 피삭(Pisaq)과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를 찾아갑니다. 글·사진 써니(여행 작가)

 

피삭의 계단식 논. 모라이의 연구 결과물을 이곳에서 재배했다고 한다.
‘빨리빨리’ 한국인, 남미의 여유를 탐하다!
우루밤바 강을 따라 피삭과 오얀따이땀보에 가는 날이다. ‘우루밤바’는 잉카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성스러운 계곡’이라는 뜻이다. 잉카인이 성스럽게 생각한 강인 만큼 중요한 유적들이 강을 따라 분포돼 있다.

그중 대표적인 유적지가 피삭과 오얀따이땀보다. 피삭은 성스러운 계곡 투어의 시작점으로, 잉카의 전형적인 계단식 농경지와 원주민 전통 시장으로 유명하다. 오얀따이땀보는 성스러운 계곡의 중심이 되는 도시다. 돌로 만든 길과 벽, 수로 등 잉카 시대 도시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다.

투어 버스를 예약하고 설레는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찾는 여행객들이 많아서일까. 밴을 타던 다른 투어와 달리 미니버스가 ‘턱하니’ 대기하고 있다. 밴이건 미니버스건 남미 스타일이긴 마찬가지다. 오전 9시에 출발한다던 버스는 오전 10시가 돼서야 느긋하게 시동을 건다.

하지만 여행 일정이 지연돼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은 나뿐이다. 버스 안은 거짓말처럼 여유롭다. 복장이 터지지만 ‘빨리빨리’가 몸에 밴 나 자신을 또 들킬까 조용히 있었다. 여행을 오래 해서인지, 이젠 남미 사람들의 느긋함이 ‘살짝’ 부러워질 때가 많다.

 

잉카인들의 묘지에서 친근감을 느끼다?

위 신전 건물에 비해 투박한 농민들의 집터.
버스를 타면 어김없이 몸을 구기고 잔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는 남미 여행에서 얻은 나만의 충전 방식이다. 버스 안에서 한 시간 정도 숙면을 취하는 사이, 피삭에 도착했다. 피삭은 유적뿐 아니라 원주민 전통 시장으로도 유명하다. 기념품이나 알파카 용품 등을 쿠스코 시내보다 훨씬 싼값에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세 번이나 서는 장날을 피한 불운에, 빡빡한 일정까지 겹쳐 투어 버스는 피삭 마을을 구경할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유적지만 들를 뿐이다. 남미인들의 소소한 삶의 모습을 만끽할 기회를 지나쳐  아쉬웠다. 계곡 사이로 멀리 보이는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사실 매사가 그렇다. 흘려 보낸 것들은 왠지 더 마음에 남지 않던가.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은 꽤나 운치 있어 보였다.

피삭은 계곡을 따라 계단식 농경지를 개발한 곳이다. 지난 호에 소개한 잉카의 농사법 연구소 모라이에서 개량한 감자와 옥수수를 재배했다고 한다. 계단식 농경지 한쪽으로는 이 농경지를 경작한 잉카의 농민들이 살던 마을 터가 남아 있다. 매끈한 다각형 돌로 만든 신전과 달리 피삭에 있는 농민들의 집은 표면이 거칠고 투박한 돌로 지어졌다. 투박해 보이지만 대지진에도 끄떡없었다니 잉카의 건축 기술은 정말 대단하다.

마을 터와 마주 보이는 산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구멍은 잉카 묘지의 흔적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미라를 자궁 속 태아 모양으로 안치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빌리면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듯 맞은편 산의 조상들에게 아침저녁으로 인사했을 것이라고 한다. 현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생활 방식이지만 우리 조상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어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런 종류의 친근함 느끼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오얀따이땀보의 수로.
성스러운 계곡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오얀따이땀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성스러운 계곡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오얀따이땀보다. 잉카 사람들이 사용한 길을 따라 마추픽추까지 3박 4일간 걷는 ‘잉카 트레일’의 시작점이자 마추픽추까지 가는 기차가 있는 곳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마추픽추에 가기 위해 들르는 도시다.

오얀따이땀보는 성스러운 계곡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인데도 스페인 군이 도착했을 당시까지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도시가 커서라기보다 계속 발전하고 확장됐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마을 한쪽에서는 마을을 세우다 만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오얀따이땀보에서는 잉카의 또 다른 건축 기술을 접할 수 있다. 오얀따이땀보 신전의 벽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정교하다. 하지만 다른 유적지들과 조금 달랐다. 큰 돌 사이에 얇고 긴 돌을 끼운 것. 중간에 끼운 돌이 쿠션 역할을 해 지진에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이곳 역시 도대체 사람이 옮겼을 것 같지 않은 큰 돌이 많았다. 문제는 근처에 이런 돌을 얻을 만한 산이 없다고 한다. 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그 위에 돌을 올린 다음 사람들이 밧줄로 당겨서 옮겼다고 한다. 돌을 운반하는 길을 가로질러 흐르는 우루밤바 강이 걸림돌일 수밖에. 하지만 잉카인은 좌절하지 않았다. 임시로 물줄기를 돌려 강을 건넌 뒤 원상 복귀시켰다니 ‘의지의 잉카인’이다. 오얀따이땀보는 잉카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가 보존돼 유명하기도 한다.

유적지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 안으로도 수로가 남아 있고, 아직도 물이 흐른다. 잉카의 주신은 태양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물을 숭배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수로를 둘러보며 한참 감탄하는데 가이드가 투어 팀을 불러 모은다. 사람들이 다 모인 걸 확인하더니 반대쪽 산을 가리킨다. 산 중턱의 직사각형 건물이 곡물을 저장하던 창고다. 그 앞으로 보이는 얼굴의 형상은 창고를 지키는 수호신의 모습이란다. 할리우드 영화의 로봇을 연상시키는 얼굴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로봇이 잉카의 수호신을 연상시킨다고 해야 맞으려나.

아른거리는 수호신의 얼굴 찾기를 끝내고 유적지 밖으로 나가니 알록달록 기념품을 파는 시장이 펼쳐진다. 영화의 플래시백(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도중 갑자기 다른 시간대로 넘어가는 기법)처럼 과거와 현재를 한 곳에서 만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시간을 넘나들며 다채로운 삶의 궤적을 좇는 경험, 바로 여행지에서 맛볼 수 있는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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