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빗줄기와 쨍한 햇살이 번갈아 이어지는 날씨를 동무 삼아 강원도 삼척으로 가는 길. 안개 속을 더듬으며 영동과 동해고속도로를 지나 뻥 뚫린 7번 국도를 달렸다. 이번 가족 여행의 콘셉트는 ‘여유와 휴식’이다. 북적대는 여름휴가가 지나고 아직 단풍 시즌 초반이니 한적한 여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앉아 쉬고… 
발길 닿는 대로 삼척을 훑어보자는 심산이다. 삼척 관광객 열에 아홉은 들른다는 환선굴 대금굴 동굴 투어도 패스하기로 했다. 아이들과 유적지에만 가면 자동으로 따라붙는 엄마표 설명도 접었다. 그러니 아이보다 먼저 삼척의 바다와 숲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취재·사진 홍정아 리포터 tojounga@hanmail.net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장엄한 촛대바위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 화면에 등장하는 촛대바위 앞 해변에 숙소를 정했다. 펜션 뜰 한쪽에 배용준과 최지우의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다. 10여 년 전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를 이곳에서 촬영했단다. 그러고 보니 방문턱에 쪼그리고 앉아 바다를 내다보던 연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도 같다. 
 
아이들은 짐을 풀기도 전에 바다부터 찾는다. 날이 흐리고 쌀쌀했지만,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붙이고 해변으로 뛰어나간다.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으며 노는 동안 우리 부부는 뒤편으로 난 계단을 올랐다. 
촛대바위로 가는 길은 계단 몇 개만 오르면 될 만큼 수월하다. 촛대바위 앞 전망대에서 바다를 내려다봤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짙푸른 바다, 하얀 파도가 동해의 진수를 보여준다. 해돋이가 특히 장관을 이룬다는데 날씨가 흐려 장관을 볼 수 있을지 미지수다.  
 
촛대바위 주변은 조선의 한명회가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의 ‘능파대’로 불렀을 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금의 촛대바위는 여러 기암괴석 중 촛대처럼 생긴 바위 하나를 지칭하지만, 원래 바위는 두 개였다. 숙종 7년(1681) 강원도에 지진이 났을 때 그중 하나의 중간 부분이 부러져 지금의 형상이 됐단다. 기묘한 바위들을 보노라니 왜 이곳이 동해8경 중 1경으로 꼽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동녘 바다를 개척한 신라 장군 이사부를 기억하다 
 
촛대바위를 뒤로하고 해변을 걷다 건너편 절벽 끝에 세워진 현대식 건물을 발견했다. 신라 때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한 이사부장군을 기리는 이사부사자공원의 전망 타워다. ‘독도는 우리땅’ 가사에도 등장하는 이사부 장군은 배에 나무로 깎은 사자를 싣고 삼척에서 출발해 우산국을 정벌했다. 장군의 용맹함을 빼닮은 나무사자상 수십 점이 공원 곳곳에 전시되었다. 모두 ‘대한민국 나무사자 공예대전’에 출품된 작품. 
 
공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이곳 역시 삼척 해안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이사부 장군의 해양 개척 정신까지 깃든 곳이라니 절로 숙연해진다. 
 
전망 타워 1층에 들어서자 정면 오른쪽에 이사부 장군의 초상화가, 그 왼편에 독도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촬영한 영상을 볼 수 있는 대형 스크린이 있다. 날씨가 흐린 덕분에 독도와 주변 풍경을 또렷한 화질로 볼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맑은 날에는 CC-TV에 햇빛이 반사되어 전송 영상이 뿌옇다고. 
 
공원은 나무사자상 외에도 도계의 유리공예 전시장을 갖춰 볼거리를 충족한다. 3층 높이의 전망 타워에서는 각종 전시물과 아름다운 유리공예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애랑 처녀의 넋을 달래기 위한 해신당과 남근숭배 사상 
 
다음 날 가볍게 아침을 먹고 해신당공원으로 향했다. 해신당공원은 삼척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울진으로 향하는 7번 국도 신남마을에 있다. 환선굴, 해양 레일바이크 등과 함께 삼척의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공원에 도착해 표를 끊고 위로 쭉 뻗은 계단을 오르는데 이게 웬걸. 계단 양옆과 공원 곳곳에 남근 조각이 즐비하다. 동해안 유일의 남근숭배 민속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라는 사실을 도착해서야 안 리포터. 여유와 휴식을 앞세워 사전 조사를 소홀히 한 탓일까.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억울한 처녀의 혼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알고 왔는데 당황스럽다. 
 
아이들은 해신당에 얽힌 가슴 아픈 전설에 더 관심을 보였다. 바로 애랑 처녀와 덕배 총각의 사랑 이야기.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덕배 총각과 애랑 처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어느 날 애랑이 바위섬에 미역을 따러 간다고 하니 덕배가 떼배에 태워 바위섬에 데려다주고 밭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센 파도가 몰려와 덕배는 배를 띄우지 못하고, 애랑은 바위를 붙잡고 견디다 결국 파도에 쓸려 죽었다는 이야기다. 해신당은 죽은 애랑 처녀의 억울한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애랑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동해안 어민의 생활문화를 한눈에 ‘삼척어촌민속전시관’  
 
공원 구석구석을 누비다 반가운 건물을 찾아냈다. 삼척어촌민속전시관이다. 안에 들어가니 볼거리가 가득하다. 물고기 박물관에 온 듯 바다와 민물에서 사는 다양한 어종 모형이 전시되었다. 전통 어가와 풍어제인 별신굿 등 동해안 어민의 생활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해안 마을에 사는 어민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미니어처는 동이 터오는 장면을 실제처럼 연출해 눈길을 잡는다. 입장객이 전시대 앞에 서면 센서가 작동해 ‘붕~’하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조명이 밝아지면서 해가 뜨는 방식이다. 일출을 놓친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듯 아이들은 그 앞에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즐거워한다. 
 
선사시대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어법(漁法)과 도구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이들이 특히 재미있어한 것은 배에 올라 운전을 하는 듯한 승선 체험. 운전석에 앉으면 정면의 모니터에 바다 풍경이 펼쳐지고, 출발과 함께 배가 덜컹거리며 실제 바다 위를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꽤 재밌다.  
 
관람을 마치고 전시관을 빠져나오는데, 출구 한쪽에 빨간 우체통이 보인다. 
‘추억의 느린 우체통’이다. 편지를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삼척우체국에서 수거해 6개월 뒤 주소지로 배달해준단다. 안내 데스크에서 엽서를 무료로 나눠준다는데, 직원이 없어 쓰지 못했다. 여행의 추억을 글로 담지 못해 아쉬웠다. 
 
삼척의 자랑, 황영조기념공원에서 만난 올림픽 정신
 
삼척시 근덕면 초곡1리는 마라톤 영웅 황영조 선수의 고향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초곡리에 기념공원과 전시관이 있다. 삼척의 명물로 떠오른 해양 레일바이크의 코스가 지나는 곳에서도 황영조터널을 만날 수 있다. 도로 이정표에 황영조기념공원이 또 나오자 작은아이가 묻는다. 
 
“엄마 황영조가 누구예요? 조선 시대 사람이에요?” 
 
하하하, 생각할수록 우습다. 공원과 터널까지 이름이 들어 있으니 당연히 돌아가신 위인이려니 했나 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아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예정에 없던 황영조기념공원으로 차를 돌렸다.  
 
비가 내리는 날씨 때문인지 공원은 한산했다.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구조가 아니라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쪽엔 기념관이, 저쪽엔 공원이 꾸며져 있다. 
 
3층 규모의 전시관에는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을 제패하기까지 성장 과정과 훈련 과정 등을 소개하는 각종 사진 자료와 올림픽 우승 당시의 기념사진, 각종 마라톤대회 참가 사진과 물품 등이 전시되었다. 어머니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물질을 해 아들을 키워낸 모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깊이(?)있는 내용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입장료를 받았다는데, 돈 내고 들어왔으면 좀 억울하겠다 싶다.
 
그나마 흥미로운 건 근대 올림픽이 고대 그리스 제전경기의 하나인 올림피아제(祭)에 기원한다는 등 올림픽에 관한 전시물. 오륜기의 의미부터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까지 아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이 추가되는 순간이다.   
저작권자 © 넥스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