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래와 냉이 같은 향긋한 봄나물이 상에 오르면 이모 생각이 난다. 제주 해녀였으니 이맘때 이모 댁에 놀러 가면 해삼 소라 전복 등 바다에서 갓 잡은 신선한 해산물과 반찬들이 한 상 가득 올랐다. 이모는 “들판에 봄이 오면 바다에도 봄이 온다”고 하셨다. 여름이 오기 전 막바지에 다다른 봄, 입안 가득 바다의 봄을 맛보고 싶다면 그 섬에 가야 한다.

제주도에서 무얼 먹을까 고민 중이라면 일단 모슬포로 가자. 제주공항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모슬포는 가파도와 마라도를 연결하는 여객선을 운항하여 ‘섬 안의 섬’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며, 방어 옥돔 감성돔 우럭 등 어종이 다양해 낚시꾼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예전에는 암초가 많고 수심이 얕아 작은 어선들도 입항을 꺼린 곳. 게다가 바람이 강해 ‘못살포’라 불릴 정도였다니 당시의 척박한 환경을 지명이 대변해준다. 지금은  제주 바다의 온갖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황금 어장으로, 태풍이 불 때면 주변 지역 선박들이 위해 모여들고, 매년 11월 중순에는 ‘최남단 방어축제’가 열리는 국내 최대 방어 산지로 유명하다.

고소한 바다의 보리, 고등어회
모슬포에 도착하면 고등어회를 먹어보자. 고등어는 ‘바다의 보리’라고 할 정도로 맛나고 영양이 풍부하며 값이 싸서 서민적인 생선. 하지만 횟감으로는 아주 귀하다. ‘살아서 썩는다’고 할 정도로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소금에 절여 팔기 시작한 것이 ‘자반고등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고등어는 국을 끓이거나 젓을 만들 수는 있으나 회로 만들지는 못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모슬포에는 비린내 없는 고등어회가 있다. 비린내는 생선이 부패하는 것을 의미하니 고등어에서 비린내가 난다면 잡은 뒤 시간이 경과한 것. 반대로 말하면 금방 잡은 싱싱한 고등어는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제주와 몇몇 산지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고등어회다.

갓 잡은 고등어회는 맑고 투명한 것이 특징. 굳이 입에 넣지 않아도 눈으로 탱글탱글한 이 느껴진다. 일단 눈으로 맛을 보고 본격적인 시식을 해보자. 고등어회를 주문하면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간 한 고슬고슬한 밥과 김이 함께 나온다. 김 한 장에 밥을 얇게 올린 다음 고등어회를 놓고 매콤하게 양념한 부추와 양파를 얹어 싸 먹는다. 이것이 모슬포 스타일! 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치아가 부실한 어르신도 걱정 없고, 담백해 어린아이들도 좋아한다.
그런데 식당 한쪽 방에 두툼한 돼지고기 덩어리와 꼬치에 꿴 돼지고기가 보인다.
“걍 한번 맛보랜 하는 거주(그냥 한번 맛보라는 거지).”

돼지고기 산적은 제주도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 돼지고기를 손가락만 한 크기로 썰어 대나무 꼬치에 꿴 다음 다진 파와 마늘, 깨소금, 참기름으로 양념해 팬에 지지는데 반드시  홀수로 꿴다. 제주도에서는 돼지고기 외에도 쇠고기나 상어고기, 문어 등을 꼬치에 꿰어 만든 적을 제사상에 올리기도 한다고. 

투박한 제주도민의 삶을 담은 맛, 자리물회
“아줌마, 자리물회 하나 줍서(자리물회 1인분 주세요).”
쓱쓱 뚝딱뚝딱 도마 두드리는 소리 몇 번 나니 자리물회가 등장한다. 찬 음식이라는 특성도 있지만, 그다지 손이 많이 가지 않아 조리 시간이 짧은 것이 자리물회다. 자리돔을 뼈째로 썰어 상추 깻잎 오이 등 채소에 깨와 식초, 다진 마늘과 파 등으로 양념한 찬 된장국에 말아 먹는다. 자리돔은 제주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대표 어종으로 4월부터 7월까지 제철이다. 회나 구이로 먹고, 젓갈을 만들기도 한다. 자리돔으로 만든 음식, 특히 젓갈은 독특한 향과 맛으로 뭍사람들에게는 도전(?)해야 하는 음식이요, 입에 익히기 어려운 음식이다. 해서 제주 사람과 뭍사람을 구분하는 지표(?)라며 우스갯소리도 한다.

 
제주도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과 거친 바람 등 자연환경 탓에 먹거리가 귀했다. 대다수 여성이 밭일과 물질을 하며 살았기에 요리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산과 바다, 들판에서 채취한 제철 재료 위주로 간단하고 빠르게  만들어 먹는 음식을 선호했으니, 이는 오늘날 제주 음식의 특징이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워지는 제주 스타일
뭍에서 그리워하던 음식을 잔뜩 먹으니 온몸에 힘이 솟는다. 포만감을 만끽하며 모슬포항을 거니노라니 가파도행 배가 들어온다. 그 배에 몸을 싣고 제주의 바닷바람을 가슴속 깊이 넣는다. 5월의 가파도는 청보리밭 물결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또한 보고 가지 않으면 눈에 삼삼할 터. 아니나 다를까. 가파도는 온통 청보리 세상이다. 그 자락 끝에 주황색 지붕을 인 집들이 있고, 그 너머엔 푸르디푸른 제주 바다가 출렁인다.

가파도에서는 자전거를 빌려 해안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보기를 권한다. 한쪽에선 제주 바다가, 다른 쪽에선 유채꽃과 청보리가 인사한다. 그러다 만나는 해안도로 좌판의 간식거리가 반갑다. 미역 다시마 등 해조류를 먹고 사는 검은 덩어리 군소, 삶거나 무쳐 먹는 흰색 군벗, 종이컵에 담아주는 거북손, 꽂이에 꿴 소라 양념구이가 즐비하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제주표 간식을 한입 가득 물고 자전거를 달리니 이렇게 행복할 수 가 없다. 이것이 진정 제주의 맛이요 제주의 풍광이며, ‘제주 스타일’이다.  그때 문득 입안에서 자리물회의 뒷맛이 느껴졌다. 어릴 때는 자리물회의 참맛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 맛도  조금씩 알아진다. 따뜻한 밥 한술과 시원한 자리물회를 오물거리면 자리돔의 고소함과 새콤한 국물이 입안 가득 퍼져 탄성이 절로 난다.

 

글·사진 이동미·김미혜(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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