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움이 푹 익는다

가끔씩 생각나는 것이 있다. 먹을 것 다 먹고 다니고
가끔 맛나고 비싼 것도 먹지만, 그래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건
어릴 적 먹은 엄마의 손맛이다. 여자 나이 마흔 중반이 넘어도
엄마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글·사진 이동미(여행 작가)


 
코끝을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
고속도로를 달리다 신림 IC에서 빠져 꼬불꼬불 시골길을 달린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고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으면 마을 하나가 나온다. 황둔이다. 행정구역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한적한 초등학교가 있고 녹슨 농구대와 문을 닫은 머리방(미장원)이 있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찐빵을 만들어 파는 집들이 유난히 많다. 이름도 비슷비슷하고 모양도 고만고만한 집들이 몰려 있어 마을 전체에서 구수한 찐빵 냄새가 난다. 누구의 시였더라?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하는 구절이 있다. 아,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다. 이 마을에서는 ‘찐빵 찌는 마을마다 구수한 냄새…’ 이런 시구가 어울린다. 

드높은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길가에 늘어선 가마솥 뚜껑 사이에 김이 오른다. 솥 근처에서 삼삼오오 찐빵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열어젖힌 가마솥 김 세리머니에 환호성을 지른다. 포장하는 사이를 참지 못해 솜사탕을 먹듯 뽀얀 찐빵을 뜯어 입안 가득 물고 팥의 달콤함과 흰 빵의 부드러움을 즐긴다. 상자 안에 든 찐빵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간식으로 제격이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아이들 밤참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요긴하게 쓰일 터다.

가족이 운영하는 정겨운 가게
마을을 휘감는 개울을 끼고 100m쯤 이어지는 거리에 들어선 10여 개의 찐빵 가게들. 저마다 무슨 찐빵이라는 상호로 시선을 끄는데, 만든 이의 이름을 내건 집이 많다.
“자기 이름 걸고 만드는데 어찌 허투루 만들 수가 있어요?!”
어머니가 만들면 어머니의 이름을, 며느리가 만들면 며느리의 이름을 내거는 건 이곳 찐빵 집들의 솔직하고 우직한 자신감이다.
“하나 먹고 가면 안 될까?  배고픈데….”
사실 배고프지 않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찐빵을 보니 먹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이다. 밥 배, 빵 배, 술 배가 다 따로 있다고 했다. 슬그머니 군침이 돈다. 못 이기는 척 찐빵 집에 발을 들인다. 이 집은 35년 전통의 ‘황둔 공순희 쌀 찐빵’. 열심히 찐빵 빚는 아주머니에게 공순희씨냐고 물어보니 동생이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을 맞혀 보란다. ‘공순미? 공순실? 공순…?’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맞혀보란다. ‘공순자?’ 깔깔깔 웃음이 오간다. 찐빵을 빚는 사람은 동생 공순자씨와 공순희씨의 남편 정성환씨. 공순희씨는 재료를 가지러 갔다고 한다. 그렇게 이 거리 찐빵 집들은 가족 운영이 주를 이룬다.
그 아랫집은 ‘하문호 뉴 황둔 쌀 찐빵’. 흔히 찐빵은 밀가루로 만든다. 하여 이 집 주인장은 독특함으로 승부하기 위해 쌀가루를 생각해냈고, 결과는 성공. 영양을 생각하는 신세대 주부들의 반응이 좋아 매출이 쏠쏠하단다.

두 번 발효하는 수고로움이 맛의 비결
다음은 ‘황둔 원조 찐빵’. 이름 그대로 이 집이 황둔 거리에서 처음으로 찐빵 집을 낸 원조다. 어릴 때 친정어머니가 해주던 찐빵이 그리워 만들어 먹다가 찐빵 집까지 내게 되었다고. 어머니가 해주시던 대로 반죽을 8시간 발효한다. 따뜻하게 두어야 하기에 방에 불을 때고, 밀가루 반죽을 커다란 그릇에 담아 덮는다.

팥을 넣고 동그랗게 빚은 뒤 다시 5~6시간을 발효한다. 모양 빚은 찐빵 또한 앵글로 짠 틀에 넣어 발효 중이니 가게 안쪽은 찐빵 빚는 아주머니들과 발효되는 찐빵으로 복작댄다.
요즘 대도시에서는 이스트를 넣고 1시간쯤 지나 빵 반죽이 조금 일어나면 찐빵을 만들어 찐다.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1, 2차 발효를 거친 찐빵과는 식감이 다르다. 기포 층이 발달해 한없이 부드럽고 폭신한 전통 찐빵에 비해 속전속결 찐빵은 부드러운 맛이 떨어지고 단단함이 느껴진다. 대신 팥에 설탕을 많이 넣어 단맛으로 무마한다. 전통 찐빵에 들어가는 팥은 그 자체의 달콤함과 구수함이 느껴지는데 말이다. 패스트푸드가 전통 먹거리에도 스며든 모양이다. 최첨단 스피드 시대를 살아가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먹는 것만큼은 왠지 서운하다. 그래서 복잡하고 궁색해 보이는 이 집이 마음에 든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니 신이 만든 미각만큼 정확한 걸까?

찐빵에 무지개가 어리다
황둔 공순희 쌀 찐빵 맞은편은 ‘황둔 찐빵마을’. 이 마을의 고유명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찐빵 집이 많이 생기다 보니 흰 찐빵만으로 승부하기 힘들어 어느 집에서 쑥 찐빵을 만들었다. 보기 좋은 것이 먹기에도 좋다고 그 앞집에서는 흑미를 넣은 자줏 빛 찐빵을 만들고, 건너편에서는 단호박을 넣은 노란색 찐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집의 특징은 무엇일까? 무지개 찐빵이다. 자그마치 10가지 재료를 이용한 10가지의 찐빵을 만드니 한번 읊어보자. ‘쌀 찐빵, 검은 깨찐빵, 잡곡 찐빵, 옥수수 찐빵, 흑미 찐빵, 고구마 찐빵, 솔잎 찐빵, 미나리 찐빵, 쑥 찐빵, 단호박 찐빵’. 한 상자에 다 넣는 모둠 찐빵을 담을 때면 주인도 헷갈린다. 어쨌든 갖가지 색을 내는 화려함이 이 집의 주 무기다.

황둔 원조 찐빵의 맞은편은 서울에서 지내던 아들 내외가 내려와 1년간 배운 뒤 차린 ‘황둔 쑥 찐빵’이요, 다리 건너기 전은 ‘김가네 찐빵집’ 등 집마다 꽈배기며 만두를 시식용으로 내놓으니 이 거리는 지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하고 배가 부르다.

학교에 다녀오면 안방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씌운 빵 반죽이 있었다. 반죽 느낌이 좋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다 혼이 난 기억도 있다. 찜 솥 주위에 몰려 있다가 어머니가 뚜껑을 열면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뜨끈뜨끈한 찐빵을 하나씩 받아 들고 행복해하던 기억이 황둔 찐빵 마을에 고스란히 담겼다. 더운 여름이지만 이열치열이라고 정겨움이 푹 익는 황둔 찐빵 마을에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추억과 사랑도 함께 가져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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